그 질문이 왜 불편했을까?
어떻게 비건을 하게 됐어? 왜 비건 해?
나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수없이 들었던 이 질문,
왜 그렇게 불편했을까?
질문을 하는 사람은 모른다. 질문을 하는 사람이 갑, 질문을 받는 사람이 을이라는 걸.
우와, 비건을 한다고? 그럼
"네가 비건을 하는 이유를 설득해 봐, 나를 납득시켜봐"를 넘어서서
"너는 왜 그런 선택을 했어? 너는 왜 우리랑 달라? 너가 너인 걸 설명해 봐"라는 뜻이 된다.
설명 이후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1. 에이, 별 거 아니네. (관심이 팍 식음)
2. 그래도 힘들지 않아? 밥은 어떻게 먹어? 사회생활은? (질문 폭격)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결국 나의 선택, 나의 삶에 대해 판단당하고 평가당하는 것이다.
자리와 상관없이 '설명해야 하는 대상'이 되는 과정이 반복된다.
이 경험이 누적될수록, 씁쓸함도 쌓인다. 내가 나인 게 부적절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대체 왜 그럴까?
어떻게 커피를 좋아하게 됐어?
커피를 왜 마셔?
커피에 대한 질문을 받는 사람들은 자랑스럽게 대답한다.
"나는 커피 향이 너무 좋아!", "하루의 시작은 커피 없이는 안 돼!"
커피는 나 혼자서만 좋아해도 된다. 당신이 나와 같이 커피를 좋아하게 된다면 땡큐고, 아니어도 그만이다.
비건은 다르다. 비건을 지향하는 건 나 혼자서만 해서 될 일이 아니다. 비건은 취향의 영역이 아니라, 전지구적 팀플이다.
당신도 나처럼 차 대신, 우유 대신, 에너지드링크 대신 커피를 마셔주길 바라는 거다.
당신도 나처럼 비건을 지향해 주길 바라는, 티는 안내지만 숨겨둔 마음이 있다.
그래서 상대를 납득시키기 위해 비효율적인 노동을 한다.
내가 본 것, 경험한 것, 알고 있는 것들을 꺼내어 당신도 공감할 수 있도록 매력적으로 편집한다.
반감 가지지 않도록 무시무시한 이야기는 스킵한다. 강요받는다는 느낌이 안 들도록 무심한 척 말한다.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당신이 비건을 하게 되면 좋겠으니까, 혹시라도 내 이야기가 씨앗이 될 수 있으니까
머리가 아니라 내 마음이 나의 이야기를 편집해서 들려준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설명했는데, 그냥 한 순간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장작 1로 쓰였다는 걸 느낄 때마다
내 마음에는 타다만 장작이 하나씩 쌓여 좌절의 무덤을 이룬다.
그래서 이제는 질문을 거절하려 한다.
상대와 나의 상태, 그리고 상황을 고려해서 선택적으로 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