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 셰어하우스 만들기 7화
이사를 준비하며 가장 끔찍했던 퀘스트는 '짐 싸기'가 아니라 '전세 대출받기'입니다.
은행 맵에서 가장 불리한 직업과 펫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요, 현재 소득이 없고, 집이 다가구입니다 하하.
한국 사회에서 비건으로 살아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저의 최초 목표는 '청년 버팀목 HUG'로 대출을 받는 것이었어요. 청년들이 받을 수 있는 가장 금리가 저렴한 대출! 금리가 2.0%이기 때문에 1억을 빌린다고 치면 매달 16만 6,667원씩만 납부하면 되는 아주 혜자 상품입니다. 심지어 무직이어도, 집이 다가구여도 청년 버팀목 HUG로 대출을 성공했다는 후기를 네이버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었어요. 그리고 우리 집의 기특한 점은 근저당이 아예 없어요. 그래서 은행 입장에서도 '안전한 집'으로 판단을 해줄 거다,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HUG 버팀목 자체로도 은행에서 꺼리는 상품이긴 하지만, 단 한 군데라도 받아주면 고정 지출을 훨~씬 절약할 수 있으니까, 하.나.만. 뚫.자. 결연하게 다짐했습니다.
마음에 드는 집이 생겼을 때, 등기부등본과 건축물대장을 들고 은행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일일이 방문하니 여간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한번 갈 때마다 20-30분씩 대기는 기본이요,
"대출이 너무 많이 밀려있어서 4월까지는 어려워요"(2월 말에 방문했는데도!)
"다가구는 안 해요. 저희 지점에서는 빌라나 다세대처럼 호수가 구분되는 곳만 하고 있어요"(동네에서 버팀목 대출을 제일 잘해준다고 소문난 은행인데도!)
대부분 거절을 당했거든요. 이 소식을 인스타에 공유하니 친구가 비법 하나를 알려주었습니다.
"은행 콜센터에 먼저 전화를 돌려봐. 직접 가보라고 할 텐데, 그럼 이렇게 얘기해 봐. '제가 직장인인데 연차 쓰고 가도 하루에 몇 군데 못 돌고, 다 거절만 당해서 그래요.' 한 번만 확인 부탁드려요 ㅠㅠ"
이런 천재적인 방법이..! 이래서 고인물 따라다니는 게 중요합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9시 땡 하자마자 전화를 돌렸습니다. 하나은행, 국민은행, 우리은행, 신한은행, 농협은행..
"안녕하세요. HUG 청년 버팀목 다가구도 취급하는지 방문 전에 확인 좀 하려고요. 혹시 **지점, **지점도 확인 가능할까요?"
17개 지점을 확인했는데요, 전부 다가구여서 안된다고 했습니다. 싹쓸이 거절당했어요. 한 군데서 거절할 때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씩 후두려맞는 느낌이었는데요. 17대를 맞은 저는 지구의 내핵까지 뚫고 푸욱 꺼졌어요. 활기차게 시작해야 할 하루의 시작부터 거절만 내리 당하니 멘탈이 아팠습니다. 대체 사람들은 어떻게 대출을 받은 거지? 답답한 심정에 저처럼 무소득&다가구 집으로 대출받은 블로그 후기에 댓글을 달았습니다. 그랬더니 한 분이 정말 친절하게 답글을 달아주셨어요.
"근저당 없고, 서류상 깨끗한 집이라면 안 해주실 수 없습니다! 저도 여기저기서 거절당해 봐서 절망스러운 맘 잘 알아요. 하지만 포기하지 마세요. 그냥 오 여기 실패~ 다른 곳 뚫자~ 이런 마음으로 다녔던 것 같아요..! 파이팅입니다!!"
실적될만한 거 먼저 물어보면 좋아한다는 팁과 함께 응원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마음을 다잡고 중.꺾.마. -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 으로 직접 발품을 팔아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은행에 직접 다니며 하나씩 도장 깨기를 시작했습니다.
"우리 지점은 행원 2명이서 모든 대출을 담당하고 있어요. 다가구는 다른 세입자들까지 봐야 해서 어려워요."
"저 말고 딱 한 집만 더 봐주시면 되는데. 어려울까요? 근저당도 아예 없어요!"
이 말에 키보드를 타닥타닥 두드리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스!! 가능성이 보인다!!
제발!!!!!!!!
"국민은행 거래내역이 지금 아무것도 없네요. 주거래 은행이 어디세요? 거기 가보세요."
"상품 개설 같은 거 해도 아예 안될까요?ㅠㅠㅠ"
"미안해요. 저희가 대출이 너무 많아서 이거까지 하면.. 미안해요"
그래도, 서류를 안 보는 곳도 많았는데 여기는 서류까지 봐주셨으니까.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주거래 은행인 농협에 갔습니다.
"안녕하세요 HUG 버팀목 대출 상담받으러 왔어요"
"고객님, 저희가 대출 가능액을 볼 때, 쉽게 말해서 이 집을 통째로 경매에 넘겼을 때 얼마나 보장받을 수 있을지를 봐야 되거든요. 그런데 이 물건지가 지금 다가구 주택이잖아요. 다가구를 취급할 때는 HF를 취급해요. HF는 무소득자 대출이 거의 어려워요."
"HUG 버팀목은요? 찾아보니까 다가구 무소득 사례가 좀 나오던데"
"그 사례가 다 적용될 수는 없어요. 사례가 있다고 해서 이거를 저희가 받았다가 안되면 그것도 그거대로 먼 길 가야 되잖아요. 보통 다가구를 취급할 때는 HF를 취급해요. 근데 HF는 말씀드린 대로 소득이나 이런 걸 봐요. 무소득자는 2천만 원 소득 기준으로 해주기는 하는데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고객님은 지금 월세가 비싸잖아요. 이거 전월세전환율해서 기존 임차 보증금 더하면 말씀드렸던 것처럼 고객님 n억짜리 전세를 구한 거랑 마찬가지예요. 이거는 대출이 나갈 수가 없어. 저희가 취급할 때마다 바들바들 손을 떨면서 제발 여기 물건지에 문제가 없기를 기도하면서 할 수 없잖아요."
"그리고 고객님 혹시 소득 금액 증명 같은 걸 떼보신 적 있으세요?"
"작년에 N개월정도 일하다가 지금은 퇴사한 상태예요."
"일단 첫째, 물건지가 좀 그렇다. 두 번째는 소득이 없으시면 그것도 어디 가든지 좀 힘드실 거예요. 왜냐하면 고객님이 상환을 못하면 보증 기관에서 90% 정도는 책임을 지고 나머지 10%는 은행이 책임져야 되죠. 은행이 책임진다는 건 대출을 취급한 사람이 책임져야 됩니다. 예전에 버팀목이 굉장히 관대하게 나갔을 때는 대학생인데 2억짜리 전세 들어가고 그랬거든요. 근데 원리금 상환을 못하거나, 혹은 원리금을 떠나서라도 이자 상환도 안 되면 그거 그때부터 연체예요. 근데 그 친구들은 뭐 어떻게 하냐고 잘 모르겠다고 누워요. 사실 저희가 여기 앉아가지고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고객님 이거 상환하실 수 있으실까 제발 문제가 없기를 기도하면서 할 수 없잖아요."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비록 제가 지금은 무소득이지만 청약 통장 있고요, 적금도 여러 개 있고, 다른 재테크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휴대폰 공과금 이런 거 밀린 적 한 번도 없어요. 직업도.. 지금은 없긴 한데, 저 한국관광공사에서 강연도 했고요, 올해 안에 책도 낼 거고요, 비건 인플루언서로 아주 대성할 거예요. 건물주 될 거예요. 그러니까, 제발 저 한 번만 믿어주세요!!"
라고 말이라도 했으면 속이 시원했을까요? 현실은 입도 뻥긋할 수가 없었어요. 내가 너무 쪼그라들었거든요.
스스로가 너무 못난 존재처럼 느껴졌어요. 나는 지금 버는 돈도 없고 직업도 없는 한심한 놈. 너 같은 건 믿을 구석이 하나도 없어. 네가 잘해야 내가 믿어줄 텐데, 제대로 못하고 있잖아. 마치 회사에서 혼나던 때 같았어요. 그렇게 20분간 일장 연설을 들으며 끽소리 못 내고 얼굴 근육이 석고처럼 굳어진 채로 은행을 나왔어요.
이후에도 은행 투어를 더 하긴 했어요. 다 거절당했지만요. 단 한 군데도 가능성 있어 보이지 않았어요.
모든 곳이 거절해도, 가능한 곳 딱 한 군데만 찾으면 되니까. 그 마음으로 시작을 했는데.
더 다니기엔 내 마음이 오래 쓴 행주처럼 너덜너덜해지는 것 같아졌어요.
고민을 많이 하다가 결국 HUG 버팀목을 포기하기로 했어요.
정말 웬만하면 허그 버팀목 받고 싶은데.
아무리 백수여도 집다운 집에서 살고 싶은 게 욕심인 걸까? 백수면 백수답게 좁아터진 집에서 살아야 할까? 내가 직업이 없다고 이렇게까지 무시를 받아야 하나. 비건이라는 삶의 방식을 선택했듯, 회사를 떠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한 것뿐인데, 사회의 시스템은 정해진 선 밖의 사람은 인정해주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괜히 퇴사했나? 직장 다닐 때 이사할걸 - 마음에 내키지도 않는 후회를 하며, 시스템 밖의 사람으로서 소외감을 느끼며, 그리고 시스템 밖으로 나가길 선택한 나를 미워하며
이렇게 자기혐오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을 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요즘은 토스뱅크로도 많이 하시더라고요"
중개인 사장님의 말씀에 토스뱅크를 들어가 봤어요. 청년전용 전월세보증금대출 상품이 있네요. 버팀목 금리와 비교하면 1.5~2배 좀 안되게 차이가 나요. 네이버 계산기로 대출이자를 두들겨보니, 커진 액수가 아깝긴 하지만 감당 가능한 수준이에요.
은행에 직접 방문하면 나를 돼지 등급 매기듯이 면밀히 보지만, 인터넷 뱅킹은 적어도 그걸 내가 직접 보지 않아도 되니까. 휴대폰 너머의 사람이 하는 거니까. 또, 토스로 대출받으면 HF 보증보험을 쉽게 신청할 수 있다는 점도 그뤠잇. 다가구는 HUG 보증보험 가입하기가 굉장히 까다로워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HF는 심사가 비교적 쉬워서요.
그래서 대출은 토스뱅크에서 하기로 확정을 짓고요, 이틀 뒤 집을 계약했어요.
대출 신청은 잔금일 3주 전에 했습니다.
가심사 넣었을 때는 3.67%였는데 실제 접수할 때는 3.66%로 내려갔어요. 아싸~!
오늘은 집주인이랑 잠시 통화할 일이 있었는데, 토스뱅크 담당자랑 만났다고 해요. 결과가 무사히 나오길..!!!!!(제발~)
이렇게 저는 시스템 밖으로 나가는 제 선택을 늘 후회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있어요. 어떻게든 우회로를 찾아서 저만의 줏대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비건도, 비건 셰어하우스도.
프로 이사러들 사이에서 "다가구는 절대 하지 마세요" 이런 말이 돌아요. 저도 직접 경험해 보고 나서야 이게 얼마나 복잡한 문제를 끌어안게 되는지 알게 되었어요. 하하. 하지만 극적으로 타개할 수 있는 방법도 찾았는데요!
다음화에는 이놈의 다가구가 왜 골칫덩어리인지, 그럼에도 다가구집이 가지는 장점은 무엇인지 이야기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