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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지만, 마포구 20평대에 살아보겠습니다

비건 쉐어하우스 만들기 1화

by 현주

저는 청년 백수입니다. 그런데 마포구 20평대 역세권에서 살겠다고 결심했어요, 그것도 한 달 안에. 첫 직장 6개월 다니다 8개월째 백수인데.. 모아둔 돈 축내며 사는데.. 20평 역세권? 꿈도 크죠.



그래서 쉐어하우스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비건 셋이 사는



제 mbti는 I로 시작해요. 드라마 청춘시대, 응답하라를 봐도 낭만이 없었어요. 맞벌이 부부 밑에서 자라 중학생 때부터 혼자 밥을 해 먹고, 혼자 tv를 보고,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게 저한테는 너무 편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셰어하우스에서 살고 있습니다.


1년 전, 부산에서 서울로 첫 독립을 했어요, 취업 때문에요. 독립도 처음, 서울살이도 처음이라 집을 구하는 게 걱정스러웠습니다. 마침, 친구의 친구가 사는 집에 방이 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나 같은 비건 지향인 4명이 사는 쉐어하우스
침대, 세탁기와 건조기, 하다못해 식기까지 다 갖춰져
몸만 들어가면 되는 풀옵션


취업 면접을 본 당일, 셰어하우스 친구들과도 같이 밥을 먹고(알고 보니 면접이었음) 양쪽에서 합격 소식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던 3명과 잘 살 수 있을까 설렘과 두려움을 안고.







같이 살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이 든 계기가 있는데요, 이사하고 두 달쯤 지나서였나요. 어렵게 취업한 저의 첫 직장은 최악이었습니다. 대우는 신입으로 하면서 자꾸 팀장급처럼 일하라고 합니다.


열몇 명 있는 전체 회의에서 임원이 제게 폭격하는 날들이 반복되었고, 직속 상사는 ‘회사 생활이 원래 이런 거다’, ‘다른 분위기 좋은 회사 다니다 이런데 만나면 그게 더 힘들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라고 했습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던 중, 같이 밥을 먹던 친구가 요즘 회사 어떠냐고 물어봤습니다. 그 말에 눈물이 주르륵 쏟아졌어요. 방에 있던 친구, 그리고 마침 퇴근한 친구까지 셋이서 저를 꼭 안아줬어요. 눈물이 더 쏟아졌습니다. 민망해서 화장실로 도망갔는데.. 제 담당인 분리수거를 대신해주고, ‘현주 민망해할라 우리 모른척하자’ 몰래 떠드는 얘기들이 참 고맙고 귀엽게 느껴졌어요.


만약 혼자 살았더라면 심각한 우울증에 걸렸을 것 같습니다. 친구들이 있었기에 회사를 6개월이라도 버틸 수 있었어요. 한동안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너희 없었음 어찌 살았을꼬..(폭풍오열)




비건이라서 좋은 점도 있습니다. 최근 본가에 내려갔다가 역체감을 하게 되었어요. 저랑 L은 비건, Y와 S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집 약속이 ‘집에서만큼은 비건, 레스웨이스트를 지향’하는 것이에요. 냉장고에는 채소만 있어요. Y의 두유, 하나 사서 저랑 L이 반씩 나눈 양배추, S의 집에서 보내준 채식김치, 각자 취향이 담긴 비건만두 등. 한 달에 한 번 가족 모임 때도 비건식당을 가거나 비건 배달음식을 먹습니다.


그런데 이번 설 연휴에 본가에 내려갔을 때 냉장고에 든 고기, 우유를 보고 흠칫했습니다. “그래도 고기 먹어야 하지 않겠니” 하는 잔소리를 피할 수도 없었어요. 얼른 서울 집으로 돌아오고 싶었습니다.


또 좋은 점은 ‘집이 넓다’는 거예요. 집이 불편하면 집 밖으로 많이 나돌아 댕기죠. 우리 집은 각자 개인 방에 거실, 부엌이 있어요. 방은 작아도 복도랑 거실이 있으니까 갑갑하다는 느낌이 없어요. 또 공간 분리가 확실해서 음식 냄새 걱정이 없습니다. 코리빙하우스라 피트니스실, 라운지, 게임방도 있어서 밖에 나갈 일도 거의 없습니다.





물론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에요. 입주한 이래로 (msg 조금 보태서) 10번 중에 9번을 제가 밥을 했어요. ‘아니 밥솥이 비어 있는데 왜 아무도 밥을 안 하지? 나도 남이 해놓은 밥 먹고 싶은데.. 왜 나만 밥을 해야하 지?’


그런데.. 각자 이런 영역이 있더라구요. 누구는 수건 빨래를 자주 하고, 누구는 수건 개기를 자주 하고, 누구는 음식물 쓰레기를 자주 버리고. 공동 집안일 중에 담당을 정하지 않은 건 그때그때 되는사람이하자라고 했지만, 각자 조금씩 더 많이 희생하는 부분이 있었던 거예요.


생각해 보면 집에서 밥을 제일 많이 먹는 것도 저고, 유일하게 아침형 인간이라 갓 지은 밥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저예요. 그래서 그냥 묵묵히 계속 밥을 지었습니다. 친구들이 면, 빵 대신 밥을 먹는 게 뿌듯해지기 시작했어요. 아침에 일어나 밥 짓는 시간을 제일 좋아하게 되었어요.






친구들에게는 비밀인데, 사실 3개월 정도 살다가 나가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어쩌다 보니 1년 가까이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1년을 더 살아 계약 기간을 다 채우려고 했어요.


그런데 보름 전, L이 제게 말했습니다.


“현주야 너 빨리 집 알아봐. 우리 2달 안에 나가야 해. 그리고 너 혼자 살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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