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지상 작가와의 대화를 정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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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손지상 작가님과 통화를 길게 했습니다. 인간의 사고가 작동하는 방식에서 '기도'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주된 내용이었는데요. 여기서 수다를 떨었던 내용들이 제가 SF를 쓰는 이유와 여러가지 의미로 맞닿아 있기에 간단하게 한 번 정리해볼까 합니다. 대화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기에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한 것인지 뒤섞이고 조정된 글이라는 점을 감안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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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는 저와 손지상 작가 두 사람 다 멘토로써 활동하는 중, 상담자가 받는 부하를 처리하는 방법론이 무엇일까 잡담하던 중에 출발했습니다. 손지상 작가는 무속인들이 가끔 수양을 떠나는 것은 일종의 캐시 데이터를 지우는 작업이며 상담자들에게도 이러한 과정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를 이야기했고요. 저 역시 영혼의 조각모음이 필요한 때라고 동의를 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제가 손지상 작가에게 권한 행위가 하나 있었는데요. 그건 바로 기도였습니다. 제가 종교적으로 각성해서 손지상 작가에게 신을 믿으라고 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명상과 같은 정신수양의 일환으로써 기도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저 나름의 가설을 제시했다고 봐주셨으면 합니다.
제 주장은 이렇습니다. "(내가 이해하는 가톨릭적인 의미에서의)기도는 이만큼 빌었으니 그에 따른 보상을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요구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보다는 칸트적인 표현으로는 물자체, 정신분석적인 표현으로는 초자아 혹은 대타자와 주체가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며 관계맺는 방법을 찾는 과정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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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야겠군요. 저에게 있어 기도란 결정적인 순간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비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앎이나 믿음과는 궤를 달리하는 작업입니다. 본질적으로 기도에 있어 행위의 주체는 제가 아닌 제 외부의 영역에게 있고, '비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나달라고 요청하는 작업이니까요.
보다 명확하게 예시를 들어보죠. 만약 어린아이가 버스에 치일 위기에 처했다고 해보지요. 그때 윤리적인 행위는 제가 버스에 치이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를 구하는 것이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탁상공론에 불과합니다. 버스가 아이에게 달려드는 결정적인 순간에 제가 버스에 치일 것을 각오하고 버스에 치이기로 선택하는 것은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저는 이미 그 일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믿고 있지만, 그 순간에 제가 내리는 선택은 저의 앎이나 믿음은 무력하게 척수반사적인 행위가 될 것입니다. 아이를 구하거나 현장에서 도망치거나 어느 쪽이건요.
이는 훈련을 통해 학습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저야 이미 알고 있고 선언까지도 할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정작 현실이 닥쳐왔을 때는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자신할 수 없는 일입니다.-하는 놈들은 다 사기꾼들입니다.-나아가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아이가 버스에 치일 위험에 도로에 뛰어들지 못했다고 해도, 저는 감히 그 사람을 비난하지 못할 것입니다. 평소에 아무리 선량하고 친절한 사람이더라도 이 순간은 눈을 감고 도망칠 수 있고, 반대로 고약한 성질머리에 못된 심보를 가진 사람이더라도 이 순간에 극적으로 아이를 구할 수 있습니다. 이 순간은 그저 그 자체로 운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저에게 있어 기도란 '결정적인 순간에 나의 사적인 이득이 아닌 공적인 원칙을 지킬 수 있도록 용기가 "나기를", 힘을 "주시기를"' 비는 행위입니다. 어느 쪽이건 제가 선택하는 것이 아닌 그저 바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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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뜬금없는 내용입니다만 어울리는 단락을 찾지 못해 여기에 넣자면, 결국 이는 신神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어디까지나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물자체, 대타자 혹은 초자아로서의 신에 대한 이야기가 되긴 하겠습니다만-사실 '초자연적'이라는 표현 자체는 본질을 잘 꿰뚫는 단어라고 생각하긴 합니다만-오래 전의 종교들이 탄생해야만 했던 논리에 대해서 우리는 고민해볼 필요가 있기는 하거든요.
우리가 인지하는 범주가 아무리 커지더라도 인지 너머의 존재는 존재할수밖에 없어요. 시공을 초월해 우주와 동화되지 않는 이상-애초에 이러한 동화는 상상적인 방식으로만 가능하죠-우주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무언가가 반드시 있기 마련이니까요. 결국 우리는 나의 이해를 넘어선 무언가와 교류하는 훈련을 해야 해요. 내가 그 대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일시적이건, 평생을 다해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건, 내 착각에 의한 것이건요. 그런 점에서 이 신에 대한 이야기는 피안과 차안,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고요.
결국 신은 우리가 흔히 말하듯-하지만 흔히 말하는 사람들과 달리 수학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제가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을 부디 용서해주시길-0과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만화인 <Q.E.D.>에서 인용하자면 "증명도 필요없고 패러독스도 아닌", 증명할 수 없지만 전제해야 하고 오히려 그러한 성질 자체야말로 본질인 개념인 셈이지요. 자, 뜬금없는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고 다시 기도 이야기로 돌아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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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제가 기도에 대한 저의 의견을 밝히자, 손지상 작가가 무척이나 흥미로운 지적을 하셨습니다. 그건 바로 도가 쪽에서 흔히 말하는 "차력借力"이라는 개념에 대해서인데요. 손지상 작가가 이 차력에서 "차"는 빌릴 차借를 쓴다는 점을 짚어주셨어요. 어디론가 힘을 받아 다른 단계에 도달한 상태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손지상 작가의 이야기를 따르면 비록 요즘 사용되는 차력이 일종의 흥행용 쑈-차력쑈로 전락하기는 했지만, 그 차력 시범은 어디까지나 '힘을 빌리고 있는 상황'에, '트랜스 상태'에 도달했음을 증명하기 위한 과정일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까 든 예시와 비교해도 제법 비슷해 보입니다. 어린 아이를 향해 달려오는 버스 앞에 아이를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행위는 뭘 알거나 믿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일종의 트랜스 상태가 되어서 '저지르는' 일입니다. 흔히 쓰는 표현으로는 "내가 그때 뭐에 씌였지 뭐야."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런 점에서 기도는 무척 위험한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때 뭐에 씌였지 뭐야."는 긍정적으로만 작동하지 않잖아요.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많지요. 특히 제가 앞서 주장했던 것처럼 기도를 "이만큼 빌었으니 그에 따른 보상을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요구하는 행위"로 활용한다고 해보지요. "내가 기도했으니까 나 합격시켜주세요."나 "내가 기도했으니까 나 부자되게 해주세요"처럼요. 이 기도는 그 기도한 결과가 이뤄지건 안 이뤄지건 건전한 상태가 되긴 어렵습니다. 이뤄질 경우에는 신과 나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상상적 관계고 망상으로 흐르며 아집으로 굳을 가능성이 높으니 더 위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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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근래 뇌과학에서 명상을 연구한 내용을 보면 여러모로 흥미롭더군요. 명상이 정신을 보다 부드럽고 유연하게 만들어주는 순기능에 대해 과학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더라고요. 저는 그런 점에서 기도 역시도 명상과 마찬가지로 뇌과학을 통해 연구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명상이 요가처럼 정신의 근육을 부드럽게 만들어준다면, 반대로 기도는 정신의 뼈대를 튼튼하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어떤 심지를 굳게 하는 훈련이 아닐까 싶어서 말이지요.
어디까지나 인상비평일 뿐이지만, 저는 명상을 많이 하신 분들을 보면 말랑말랑하다는 감각이 떠오르고는 합니다. 인간 슬라임이라고나 할까요. 부드럽고 충격을 잘 흡수하죠. 반대로 기도를 많이 하신 분들을 보면 단단하다는 감각이 떠오르고는 해요. 슬라임이 아니라 우직하고 흔들림이 없는 바위의 이미지라고 해도 좋겠네요. 당연히 이 둘 중 어느 한 쪽이 정답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필요와 상황에 따라 이 두 가지 특성의 장점을 스위치해서 가져갈 수 있다면 제일 좋겠지요.
기도가 대타자 혹은 초자아와의 관계를 수립하는 과정의 일환이지 않겠느냐는 저의 가설이 맞다면, 이는 곧 기도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정립하는 과정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같은 사건이 일어나도 누군가는 보다 두렵게, 다른 누군가에게는 보다 가볍게 여기고는 하는 것도 그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각자 차이가 있기 때문일 거예요. 그리고 기도를 통해, 나의 한계 너머에 이미 존재하는-혹은 마주치게 된 무언가를 대하는 태도를 보다 성숙하고 건강하게 가꾸어나갈 수 있다면, 그때 기도는 마음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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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야기한 내용은 사실 제가 SF를 대하는 태도와도 연관되는 것들입니다. 미지의 존재를 마주하고 어떤 관계를 정립하느냐에 있어서 SF는 무척이나 훈련적인 독법이라 생각하거든요. 두려워하건, 사랑하건, 경외하건 말이죠. 돌고 돌아 SF로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