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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발견한 반가움

에니어그램과 나를 안다는 것

  내가 ‘에니어그램’이라는 걸 처음 만난 건 꽤 오래 전인 2007년 [에니어그램의 지혜](돈 리처드 리소. 러스 허드슨 지음)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책 사이즈도 큰 데다가 500여 쪽이나 되는 두꺼운 책이었는데 매우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어떤 유형일지 궁금한 마음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정성껏 읽었다. 유형별로 나온 질문에 응답해가면서, 내가 5번 유형(탐구자, 사색가)이라는 의외의 사실을 발견했다. 


  정말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사색가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마음으로 상상하거나 희망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어떤 유형의 사람이라는 생각도 해보지 못한 채 그저 살아왔을 뿐. 


  그런데 확인하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그래서 그동안 이렇게 살아온 것이었구나. 이런 사람 맞네.’라는 반가운 느낌. 난생처음 나를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 참 좋았다. 지구라는 별에 태어나 50여 년을 지나는 동안 내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었는데, 나를 안다 해도 인지의 경계가 희미하고 흐릿했었는데, 책에 나오는 질문에 답하면서, 그리고 유형별 설명을 읽으면서 비로소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나의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난생처음 나를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 그렇게 반갑고 좋을 수 없었다. 


  정말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던 나는 나만 체크하고 끝낼 수 없었다. 아내와 아들까지 불러 체크하고 싶어 근질근질했다. 체크해보니 어쩌면 그리도 똑 맞아떨어지는지 속이 다 후련했다. 아들이 왜 그리도 놀기를 좋아하고 이벤트를 좋아하는지, 아내가 왜 그리도 나와 다르게 보고 느끼는지가 이해됐다. 우리 가족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유형이었고, 유형별 특성이 꽤 분명하게 드러나는 편이었는데, 서로의 모습을 피차 확인하면서 검사 결과의 정확성에 놀라기도 하고, 배꼽을 잡고 웃기도 했다.   


  에니어그램의 인간 이해가 상당히 깊고 정확하고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나는 내친김에 ‘한국에니그램연구소’를 찾아가 1, 2단계 과정을 공부했다. 그때에는 연구소에서 개발한 ‘한국형 에니어그램 성격검사지’를 통해 체크했는데 역시 5번 유형이 나왔다. 그 후 7년이 지나 다시 체크했는데 똑같이 5번 유형이 나왔다. 


  그리고 지나온 삶을 돌아봤다. 예수님과 함께 걸어온 나의 목회자 인생을 돌아봤다. 한 마디로 책과 더불어 살아온 인생이었다. 책과의 대화가 좋았고, 주님과 더불어 생각하는 게 좋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설교를 준비하는 게 좋았고, 소수의 사람들과 속 깊은 얘기를 나누는 게 좋았다. 여럿이 모여 수다를 떠는 일에는 젬병이었지만 둘셋이 앉아 마음속 이야기를 나누는 건 언제나 좋았다. 세상과 격리된 채 6년간의 힘겨운 투병생활을 할 때도 크게 힘들지 않게 지냈다. 반면에 소란함과 번잡함은 항상 부담스러웠다. 생활이 바쁘면 도대체 사는 맛이 나지 않았다. 그저 자연을 호흡하는 것이 좋았고, 고요함이 좋았다. 지금 내가 사는 곳은 하루 종일 차 소리나 사람 소리가 없다. 산허리를 돌아가는 바람 소리와 컹컹 짖어대는 개소리와 새들의 재잘거림 외에는 아무 소리가 없다. 인공의 소리가 일절 없는 지금의 이 고요가 너무 좋다. 


  이렇게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깨달았다. 내가 저런 삶을 살아온 건 결국 내가 5번 유형이었기 때문이라는 것. 내가 부족해서도 아니고, 내 능력이 탁월해서도 아니고, 내가 취사선택하여 조형해 온 것도 아니고, 오직 내가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것. 내 안에 그런 것들이 준비되어 있었기에 저렇게 살아올 수 있었다는 것. 


  결국 나를 안다는 것, 나를 바라본다는 것은 뭘까? 어쩌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나의 퍼즐 조각들을 맞추어가는 작업 아닐까. 완성된 퍼즐을 통해 나의 원형을 인지하고 나의 고유함을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 아닐까. 내 삶이 내 의욕의 산물이기보다는 선물로 주어진 것임을 깨닫는 것 아닐까. 나를 넌지시 바라봄으로써 나를 객관화하는 것, 최종적으로는 겸허의 무릎을 꿇는 것 아닐까. 나를 아는 일이 소중하고 긴요한 것도 바로 그래서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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