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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도전

근원 진실의 희미함을 발견하고

뒤늦은 도전                                 

1. 신약성경의 최다 저자요 최초의 기독교 신학자인 바울은 남달리 확신 위에 선 신앙을 강조했습니다. 구약성경이나 복음서에는 확신에 대한 이야기가 잘 나오지 않는데 바울 서신에는 의외다 싶을 만큼 많이 나옵니다(롬4:21,8:38,14:14,고후3:4,빌1:6,골4:12,살전1:5,딤후3:14). 바울의 확신에 찬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2. 정말 불같은 확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 무엇에도 꺾이지 않을 것 같은 확신의 신앙인 바울이 의외의 말을 했습니다. 자기가 아는 것은 사실상 다 희미하다는 겁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확신의 사람 바울이 이런 말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나요? 희미하게 아는 사람이 확신 운운했다는 것, 앞뒤가 달라도 너무 다른 말을 했다는 게 어처구니없나요? 저는 그리 생각지 않습니다. 확신의 사람 바울이 이런 고백을 했다는 게 더없이 다행한 일이요 더없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희미하게 아는 것이 지금의 우리에게는 운명 같은 일이니까요. 설사 계시 중의 계시인 예수를 봤다 하더라도, 세상 지식을 완전히 통달했다 하더라도 인간의 앎은 희미함의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근원 진실의 희미함을 알지 못했다면 바울은 자기 확신의 포로가 되어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지지 않았을 테니까요.

  

3.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고 말한 모세(출33:11, 민12:8, 신34:10)의 경우는 어떤가요.

모세가 한 번은 여호와께 주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는 ‘자기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다고 말씀하시며 내 등을 볼 수 있을 뿐 얼굴은 보지 못한’다 선을 그었습니다(출33:18-23)  

  이사야 선지자도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9)  


4. 중국의 현자인 노자도 근원 진실의 희미함에 대해 거듭 말했습니다. 도덕경 1장에서는 “도를 도라고 하면 그 도는 항상 있는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고 했고, 14장에서는 도의 성질을 일컬어 “이(夷)-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음, 희(希)-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음, 미(微)-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음”이라고 했으며, 41장에서는 “밝은 도는 어두운 것 같다”(明道若味), “도는 은미하여 이름이 없다”(道隱無名)고 했습니다.


5. 아둔하고 미천하기 그지없는 저 또한 오랜 세월 나름의 공부를 하면서 발견한 것은 제가 부분적으로 안다는 것, 희미하게 안다는 것, 틀리게 아는 것이 많다는 것, 정말 알아야 할 것은 알지 못한다는 것, 내가 아는 것은 거대한 백사장의 모래알 하나에 불과하다는 거였습니다. 정말 경천동지할 발견이었습니다. 한없는 은총이기도 했고요. 앎의 확신, 믿음의 확신에서 구원받는 은총의 순간이었으니까요.


6. 그리고 생각지 않은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부분적으로 아는 나, 희미하게 아는 나, 틀리게 아는 것이 많은 나, 정말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내가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전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어떤 설교를 하더라도 설교하는 일은 죄를 쌓는 일일 수밖에 없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대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옳다. 그러니 입은 다물고 몸으로 겸허히 신앙의 길을 가는 것이 정직하게 사는 길이다. 뭐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더군요.

  정말 심각한 고민거리였습니다. 설교하는 인생을 더는 살지 않는 것이 하나님 앞에 덜 면구스럽겠다 싶은 생각에 설교하는 인생을 접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접지 못한 채 아직도 여전히 주일마다 설교하는 죄를 쌓고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무리수를 두고 있습니다.


7. 아니요. 한 술 더 떠 이제야말로 설교할 수 있는 최적의 때가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부분적으로 알고, 희미하게 알고, 틀리게 알고, 정말 알아야 할 것은 알지 못하고, 아는 것이라곤 고작 거대한 백사장의 모래알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지금이 근원 진실의 어떠함을 말할 수 있는 최적의 때이고, 자기 확신으로 설교 폭력을 행하지 않을 수 있는 최적의 때라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확신은 삶과 신앙의 주요 자산입니다. 확신이 없이는 우리는 한 순간도 자기 걸음을 걸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뭔가를 성취한 사람, 사람들을 움직이는 사람은 대부분 확신의 사람입니다. 위대한 설교자 역시 확신의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확신의 사람에게 ‘나는 희미하게 안다. 부분적으로 안다. 틀리게 안다.’는 인식이 없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옆에 있는 사람에게 언어폭력, 판단폭력을 행사하지 않겠습니까. 스스로에게는 자기 자신을 자기 확신 안에 가두는 감금폭력을 행사할 것이고요.


8. 그런 면에서 저는 지금이 설교하는 죄를 적게 쌓으며 설교할 수 있는 최적의 때라는 생각을 합니다. 육체적 나이로는 목회 인생을 정리해야 할 때인데 은퇴를 눈앞에 둔 지금에 와서야 확신을 넘어선 희미함에 눈을 뜨고 구차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참 둔하고 뒤늦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뒤늦으면 뒤늦은 대로 살 수 밖에요. 하여, 저는 지금 은퇴를 준비하는 대신 새로운 목회, 새로운 설교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잘 하는 일일까요?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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