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 중앙의 두 나무(1)
생명나무가 말하는 것
성서는 최초의 삶의 자리를 가리켜 강이 흐르고 온갖 나무들이 무성한 에덴(기쁨의 동산)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부족하기라도 한 듯 동산 중앙에 두 나무가 있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그 이름도 참 독특한 생명나무와 선악을 아는 나무.
1. 왜 이토록 독특한 이름의 나무가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것일까요? 대체 어떤 의미가 있기에?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고?
인간의 존재와 삶과 관련해 너무도 의미심장한 두 나무 이야기가 에덴동산 중앙에 있다는 서술에서 저는 두 가지 메시지를 읽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삶)과 선악이라는 메시지.
둘째, 생명이 내 안에 있지 않고 내 밖에 있으며, 선악을 아는 지식 또한 내 안에 있지 않고 내 밖에 있다는 메시지.
2. 우선 첫 번째 메시지의 생명나무 부분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인간으로 살기 위해 돈, 명예, 권력, 지식, 건강, 능력, 사랑 등이 필요하다는 것 잘 압니다. 어느 누구도 이런 것 없이는 자유의 주체로서 당당히 살아갈 수 없다는 것 잘 압니다. 저 또한 그렇고요. 때문에 사람들이 돈, 명예, 권력, 지식, 건강, 능력, 사랑을 쟁취하기에 목매는 것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현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생명의 진실은 더 깊고 엄정합니다. 생명을 위해 그런 것이 요청되지 그런 걸 위해 생명이 요청되지는 않는다는 것. 옳습니다. 생명보다 소중하고 값진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두 말할 것 없이 생명입니다. 특히 개체 생명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자기 생명입니다. 예수님도 이 진실을 인정했습니다(눅12:20-23).
3. 저 또한 이 진실을 깨단했습니다. 간 이식 수술이라는 죽음의 강을 건넌 후 생명을 사는 것이 삶이고, 삶보다 중요한 건 없다는 기본 진실을 깨단하고부터 공공연하게 ‘삶주의자’를 자처했고, ‘삶주의자’로서 줄곧 말해왔습니다.
[진리든, 신앙이든, 자유든, 사랑이든, 가족이든, 국가든 좌우지간 삶을 부요케 하고 춤추게 할 때만 의미 있다. 아무리 진리라 확신하며 외칠지라도 살림살이를 가로막는다면 그것은 진리일 수 없다. 오직 삶을 북돋아줄 때에만 - 살림살이가 될 때에만 진리는 진리일 수 있고, 자유는 자유일 수 있고, 사랑은 사랑일 수 있고, 신앙은 신앙일 수 있다.]
4. 이제 첫 번째 메시지의 ‘선악을 아는 나무’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아본 사람은 압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을 살면서 경험하는 최고의 고통과 상처와 물음은 의외로 선악의 문제라는 것. 신학의 최대 난제 중 하나인 신정론만 해도 수많은 신학자들이 오랜 세월 ‘하나님은 선하신데 왜 선하신 분이 창조한 세상엔 악이 횡횡하는가?’라는 문제로 뜨겁게 논쟁한 걸 보면, 선과 악의 문제가 삶의 근본 문제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성서는 이처럼 에덴동산 중앙에 두 나무가 있다는 그림 언어를 통해 바로 이 진실 -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 삶의 중심 과제는 생명과 선악의 문제라는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5. 더욱이 성서는 생명나무 옆에 선악을 아는 나무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서는 왜 선악을 아는 나무를 생명나무 옆에 나란히 배치했을까요? 그것은 생명을 사는 일(살림살이를 하는 일)과 선악의 문제가 밀접하게 연결돼 있고, 선악의 문제가 존재와 삶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엄정한 진실을 말하기 위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성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사실 - 모든 삶은 선악의 문제와 깊이 얽혀 있다, 특히 인간과 동물이 겪는 고통과 상처는 다 선악의 문제와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 이야기, 가인 이야기, 홍수 이야기, 다윗 이야기, 예수 이야기가 다 선악의 문제와 깊이 얽혀 있는 이야기입니다.
인류의 역사도 같은 사실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미개했던 과거로부터 인간의 이성이 빛을 발하던 20세기까지, 아니 지구 위성의 주인으로 자리매김한 지금까지도 여전히 인류는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전쟁을 멈추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미개한 나라가 아닌 칸트 헤겔 바흐 베토벤 괴테 쉴러의 나라 독일에서 600만 명의 유대인을 죽인 홀로코스트가 발생했다는 것은 우리네 삶이 얼마나 깊이 선악에 물들어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6. 흔히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들 합니다. 옳습니다. 작고 사소한 부분은 결코 작고 사소하지 않습니다. 나사 하나가 비행기 사고를 일으키고, 작은 틈새 하나가 댐을 무너뜨리니까요. 하여, 총론보다 각론이 주목받는 시대적 현상을 꼭 나쁘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각론에만 치우쳐 총론을 외면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닙니다. 매사에서 경험하듯 숲과 나무를 함께 보는 시선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다행히 성서는 총론과 각론이 절묘하게 조합된 책입니다. 그중에 창세기 1-3장은 성경의 모든 이야기를 아우르는 총론 중의 총론이라 할 수 있고, 그중에 에덴동산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곳이 어떤 곳이며,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최고의 그림언어로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맨 처음 삶의 자리인 에덴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다고 말함으로써, 생명을 사는 일과 선악의 문제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 특히 선악의 문제가 존재와 삶 전체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삶의 근원 진실을 꽤나 명징하게 일깨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에덴동산 이야기에 오랜 세월 귀 기울이는 것도 에덴동산 이야기가 그림언어의 한계와 그림언어의 무한성을 모두 가진 최상의 이야기, 인생론에 있어서 총론 중의 총론 – 수많은 각론을 읽어낼 수 있게 하는 총론 중의 총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