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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림주 Feb 04. 2022

다시 겨울에, 민트리에게

아주아주 늦은 답장


브런치에 편지를 하나 남겼으니 시간 될 때 읽어 보라는 민트리의 메시지를 받았던 날이 기억나. 벌써 9개월 전이니 늦어도 너무 늦은 답장을 이제야 쓰네. 그때는 이상하게 누가 조금만 위로하는 말을 해줘도 눈물이 왈칵 쏟아져 버리는 때였어. 그래서 조금 아껴뒀다 천천히 보겠다 했지. 궁금함이 두려움을 이기는 데는 아마 며칠 안 걸렸지만.


두렵기까지 했을까, 지금 생각하니 내가 좀 안쓰럽네. 그래서 네가 안아주고 싶다고 했나 봐. 20대 후반이었나 언젠가 집 우편함에 꽂혀 있던 편지.(우표가 붙은 편지는 오랜만이었어.) 거기에 너가 또박또박 적은 글을 읽던 때도, 가끔 엽서에 짧은 편지를 건네줄 때도, 나는 민트리가 쓴 글을 읽으면 마음속 수문이 확 열리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너의 글에 그런 힘이 있는 걸 아는데. 그때 바로 읽어 버리면 내가 와르르 무너져 주체가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내가 멕시코에 잠시 다시 돌아갔던 때라고 했으니까 너도 12월에 쓰기 시작한 편지를 4월 마지막 날에 부친 거구나. 띄엄띄엄해 보이지만 우린 생활 속에 은근히 연결되어 살아가는 기분이야. 얼마 전에 내가 좋아하는 싱어송라이터 최고은 언니와 김소연 시인이 함께 만든 앨범이 있는데 거기에 ‘미지근한 우정’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거야. 미지근하다 라는 표현은 보통 훌륭하거나 좋은 것에 붙이기보단 뭔가 애매한 표현이라고 생각했거든.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게 미지근한 거니까. 근데 미지근하게 오래 보는 우정이라는 부연을 따라가 보니 왜 두 아티스트가 그 주제에 도달했는지 무릎을 탁 치고 말았네. 식을 일만 남은 뜨거움 보다 오래 미지근한 게 나을 수도 있겠어. 어쩐지 우리 둘도 생각나고 말이야.



겨울에 쓰기 시작해 봄에 받은 편지를 여름 가을 내 뭉근히 묵혀두었다가 다시 겨울에 들추어 답장을 써본다. 그 사이 참 많은 일이 있었네. 나는 악어식당을 시작했고 민트리는 꾸준히 책을 만들고 표지도 디자인하고 클래스101에 강의도 시작했지. 걷다 쉬다 할 때는 도무지 어디쯤인지 모르겠는데 어느 순간 새로운 동네에 와있는 기분 알지? 나중에 구글맵으로 우리가 지나온 길을 확대 축소해가며 돌아볼 때 ‘몰랐던 동네인데 여기 꽤 괜찮네’ 하고 깃발을 꽂는 곳에 머물렀으면 좋겠다.


맘껏 안아주지 못하는 시국에 살지만 전보다 눈 마주치는 일은 많아진 것 같아. 사실 마스크 위로 보이는 눈 말고는 딱히 눈길 둘 곳이 없기도 하고. 나는 말할 때 상대 눈을 되도록 보는 편이고 특히 술잔을 부딪칠 때는 꼭 큰따옴표 찍듯이 쳐다보는 타입이거든. 물론 쉼표 없이 눈을 맞추며 눈알 뒤편 시신경까지 뚫어질 듯한 시선 앞에선 나도 모르게 다른 곳을 찍고 돌아오지만. 입모양을 볼 수 없고 얼굴의 다른 부분 근육들이 어떤 모양으로 움직이는지 안 보이니까 눈을 더 바라보며 얘기하게 된 것 같다고 요즘 느끼고 있어. 어떤 눈빛은 말 같기도 해서 짧은 순간 참 기분 좋게 해주는 묘한 힘이 있구나 싶기도 하고.

용기 내어 장례식장에 다녀온 일은 잘한 것 같아. 유난히 마음 쓰이는 일들이 있지. ‘너의 기분을 위한 행동’이었다고 했지만 조의금 봉투에서 네 이름을 발견한 그분은 더 고마운 마음이었을 거야.


바르셀로나 어느 역에 긴장한 채로 서있었을 너를 상상하다가 피렌체에 혼자 도착했던 밤이 떠올랐어. 유럽 여행지는 소매치기 주의보를 일단 디폴트로 깔고 가는가 봐. 기차는 역시나 연착이 되었고 어둑한 다저녁에야 역에서 나왔어. 예약해둔 게스트하우스까지 걸어서 십분 정도를 가야 했는데 아까부터 어떤 남자가 따라오는 거야. 신호등을 기다렸다 횡단보도를 하나 건너고 왼쪽으로 꺾는 방향까지 일치한 걸 보고 나는 바로 옆에 걷고 있던 어떤 가족 옆에 찰싹 붙어 걷기 시작했어. 엄마 아빠와 아이 둘이었는데 누가 보면 일행으로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발맞추어 걸으니 그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네? 나는 살짝 웃어 보이며 눈동자로 뒤쪽을 가리켰어. 눈치를 챈 듯 어머니는 나에게 여행 왔냐, 어디서 왔냐 자연스레 말을 걸어주셨고 어느새 넓은 광장에 도착해 보니 검은색 비니를 쓴 그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어. 가슴을 쓸어내렸지. 어쩌면 그냥 맥주 사러 나온 무고한 동네 주민일 수도 있지만. ‘어두울 때, 외진 곳에, 혼자 다니지 않는다’는 나의 철칙을 다시 한번 되새긴 날이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그런 얘기 하지 않았니. 집을 구할 때의 조건 중 집이 너무 골목 깊숙이 있거나 집까지 가는 길이 으슥한 곳은 은근한 위험에 노출되는 거니 피해야 하는데 왜 그런 걱정은 여자들만 해야 하냐고. 그런 데가 집값이 싼데! 정확한 문장은 기억 안 나지만 대충 이런 요지의 내용이었던 것 같아.


이렇게 의식의 흐름대로 써도 된다니. 이런저런 주제로 널을 뛰는 우리의 평소 대화 같고 좋다. 어쩌다 보니 새벽에 주르륵 써버렸는데 자고 일어나면 안 올릴 것 같아서 올리고 자려고. 낼모레 같이 공주 갈 생각에 두근두근.



2022년 2월 4일

파주의 겨울을 견디고 있는 여름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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