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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림주 Oct 17. 2022

달걀 삶기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건데 일단 알고 나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달걀 삶기 같은 거다. 어릴 때 삶은 달걀을 떠올리면 단 하나의 이미지였다. 반으로 갈랐을 때 보슬보슬 고소한 완숙 노른자와 탄력 있는 흰자. 그냥 냄비에 달걀 담고 물 부어 끓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불에서 내려 찬물 샤워 후 까서 먹는 정도가 전부였다. 똑 떨어지는 하나의 정답처럼 그 이상 무엇이 있으랴 싶던 달걀 삶기에 이토록 많은 변수가 있을 줄이야.


10분을 삶으면 말랑 촉촉 맛있단 얘기를 듣고 10분 삶았더니 이게 웬걸 퍽퍽했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 아마도 달걀을 넣은 시점이 달랐을 것이다. 찬물에 달걀을 담아 냄비를 불에 올린 순간부터 10분인지, 아니면 팔팔 끓을 때 달걀을 넣어 그때부터 10분인지. 또는 달걀의 온도, 즉 냉장고에 있던 달걀인지 실온에 있던 것인지에 따라서도 결과물이 달라진다. 두꺼운 스테인리스 냄비인지 얇아서 금방 끓는 양은 냄비인지, 혹은 가스레인지와 인덕션, 가정용과 업소용의 화력 차이도 있을 수 있다. 근소한 차이겠지만 왕란과 초란처럼 달걀 크기 차이가 날 때도 있다. 처음 얘기했던 10분은 ‘실온에 있던 보통 크기 달걀을 가정용 화구를 사용해 찬물에 넣어 불에 올린 때부터 10분 삶기’ 였을 것이다. 


그 외에도 달걀 삶을 때 고려할 것들은 차고 넘친다. 냄비에 달걀을 넣을 때 그냥 던지듯 넣으면 바닥에 부딪혀 금이 가고 그 틈으로 흰자가 삐죽 나오니 국자나 집게를 사용해 슬그머니 넣는다. 끓는 물에 달걀을 넣은 후에도 계속 강불에 삶으면 껍질이 터지는 경우가 있으니 보글보글 끓을 정도로만 중불로 줄여주는 게 좋다. 여기까지 적으면서 스스로도 살짝 피곤함을 느꼈는데 이미 이것들을 알고 난 후에는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매번 모든 요소를 다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 나에게 익숙한 환경에서 좋아하는 기준을 찾고 나면 그다음부턴 타이머만 잘 맞추면 된다. 그렇지만 소금을 넣으면 껍질이 잘 까진다는 것과 식초를 넣으면 혹시나 틈으로 새어 나온 흰자도 잘 응고된다는 이야기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끓는 물에 넣어 7분은 노른자 가운데가 살아있고 6분은 온센타마고 수준이라 껍질 까기가 어렵지만 덮밥 같은 데 올리기엔 이 정도가 좋다. 만사 귀찮은 날엔 다 모르겠고 그냥 빈 냄비에 달걀 먼저 담고 수돗물 부어 시간도 안 재고 푹 삶기도 한다. 어차피 오래 삶는다고 녹아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때로 그런 날이 필요한 것 같다.


지하철 탈 때 플랫폼 번호도 그렇다. 언젠가부터 앱에서 알려주는 빠른 환승을 따라가게 된다. 파주에서 경의선을 타고 서울 방향으로 갈 때 디지털미디어시티에서 갈아타려면 1-1이고 공덕역에서 갈아타려면 8-4이다. 애초에 몇 분 차를 탈지를 알고 집에서 준비하고 나갈 시간을 역산하기 때문에 길에 버려지는 시간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니까 간혹 1-1에서 환승인데 헷갈려서 8-4에서 타기라도 한다면 거꾸로 한참 거슬러 가야 하고 환승할 열차를 놓칠 가능성도 높으니 엄청난 시간을 허비하게 되는 셈이다. 이쯤 되면 나는 뭐 하려고 이렇게 시간을 칼 같이 쪼개어 움직이는 것인가 싶다. 그냥 준비를 조금 일찍 하고 아침에 인스타그램 좀 덜 보고 대충 여유 있게 나와 어슬렁 거리듯 이동하면 무슨 큰 일이라도 난다나. 가끔은 일부러 앱을 안 보고 그냥 여유 있게 나가본다. 가는 길에 괜히 하늘도 더 올려다보고 좋아하는 숫자 3-3 앞에 그냥 서본다. 사실은 일 때문에 가는 거지만 여행 왔다고 생각도 해본다. 환승이 늦어져도 나쁘지 않다. 운이 좋아 자리에 앉으면 미어캣 마냥 사람 구경을 한다. 다들 폰을 보고 있어서 내가 두리번거려도 아무도 신경 안 쓴다. 기다리는 버스가 안 와서 목을 길게 빼고 두리번거리던 때에도 나름 잘 살았는데 어느새 이동에 있어 효율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시절이 돼버린 걸까. 버스가 언제 올지 알고 기다리는 정류장에 낭만 따위는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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