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zel Nov 01. 2023

1. H의 피아노 연습

오전에 친구 H가 피아노 연습하는 걸 지켜봤습니다. 이 친구로 말할 것 같으면 여리고 순수해서 쉽게 부서지는 순두부 같은 재질이지만, 고통에 잠식당해 꼼짝도 하지 못하는 와중에도 본인의 커리어를 조금씩 확실하게 쌓아나가고 있는 대견한 친구입니다. 그러나 분명 우울한 상태에 놓인 존재와 오랜 시간 같이 있는 건 제아무리 낙천적인 사람이라 한들 아이스크림 삼키듯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하물며 저라고 무사할 리가 있겠습니까.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내내 붙어있었기에, 누군가를 보살피기보다는 돌봄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커져 가던 차였습니다. 그래서 오전엔 카페에 가서 책을 읽을 요량으로 연습하러 가는 친구와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장기간 여행에 지칠 대로 지쳐있어서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 사그러 든 상태였음에도, 웬일인지 친구가 피아노 치는 모습이 궁금해졌습니다. 친구는 기꺼이 연습실에 같이 가자고 말해주었고, 저는 조금만 구경하다 나올 요량으로 졸래졸래 따라갔습니다.


연습실 현관문을 들어서자, 오지랖 수다쟁이 사장이 우리 둘을 맞이했습니다. 본인으로서는 선의라지만, 실은 정적보다 무가치한 3분을 견뎌내고 나서야 연습실이 늘어서 있는 마당을 지날 수 있었습니다. 친구는 1번 방에서 연습했습니다. 오전이었지만 채광이 좋아 아늑한 분위기에,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가 자기가 방의 주인임을 아는 양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늘어져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만져보는 피아노 건반은 제가 기억하던 것보다 가볍게 눌렸습니다. 플라스틱 등받이에 나무다리가 달린 의자를 피아노 의자 옆에 가져와 앉았습니다. 악보를 피고, 평소의 루틴대로 곡의 뒷부분부터 연습하기 시작하는 친구의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제 갓 연습을 시작한 뒷부분을 끝내고는,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춘 다른 부분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선율은 봄날의 연노란 꽃이 싱그러운 연두빛 줄기와 함께 나풀거리듯 부드러웠습니다. 친구의 손은 고양이를 쓰다듬듯 부드럽게 검은건반을 쓸어내리며 다음에 이어질 음표를 위한 자리로 손을 옮겼고, 그 모습은 마치 고양이가 나비를 잡기 위해 뛰어놀듯 열정적이면서도 특유의 권태로움을 품고 있었습니다. 친구는 ‘쉽게 치는 것 같아 보인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마치 피아노를 치기 위해 타고난 손짓 같아 보였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 서서히 생기고 있던 얼음 막을 깨는 무언가를 느꼈습니다. “철학이 생의 허무함을 느끼게 한다면, 예술은 그 허무함을 깨부수는 망치”라는 말을 어디선가 읽었던 듯합니다. 그러나 애초에 깨부술 게 없다면 망치가 큰 의미를 지닐 수 없겠죠. 아무튼 그 순간 저는,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정념 속에서 저를 지킬 수 있는 보호막이 생겨난 느낌, 공황장애가 지나가고 호흡을 되찾은 느낌, 안개가 걷히며 어렴풋하던 길에 가시거리가 조금은 생긴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최근에 생긴 상처들에 대한 위로, 안도감,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질투가 뒤섞여 감정이 북받쳐 올랐습니다.


친구는 우울하지도 않은 곡에 제가 왜 눈물을 훔치는지 의아한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막상 슬픔이 찾아왔을 때에는 쉽게 눈물짓지 않습니다. 제가 우는 건 감정들이 휘몰아쳐 교통정리가 필요할 때, 그러니까 행복하면서 슬프고,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울 때, 그럴 때입니다. 혹자는 제가 불필요하게 복잡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저도 때로는 단순한 감정만을 느끼며 사는 삶이 부럽습니다. 삶을 너무나도 간단하게 사는듯한 이들을 볼 때면 제 삶이 정말로 무가치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떤 삶이 더 낫다, 그르다를 논하기에는 제 식견과 삶의 경험이 너무나도 좁습니다. 아무튼 저는 이런 복잡한 삶을 살아낼 때 삶을 삶답게 만드는 무언가를 느끼는 사람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삶을 간단하게 살려고 지나치게 노력하는 건, 이런 저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라는 걸 이미 오래전에 깨달았습니다.


이 생소한 경험을 루님과 함께 나누고 싶어 짤막한 글을 썼습니다.


비 온 뒤 축축함을 품은 공원에서 제법 쌀쌀해진 바람을 맞으며 헤이즐이.

작가의 이전글 0. 회색빛 보름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