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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 리브로 Oct 06. 2023

야생의 생명력

우리 동네 흰둥이 12

공장의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니 넓게 트인 빈 공간이 나타났고 오십여 미터쯤 안쪽에 작은 건물이 있었다.

그곳에서 두세 명의 외국인 근로자들이 수레에 뭔가를 싣고 있었다.

"저기요~~  계세요~~?"

내 목소리를 못 들었나 싶어 좀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여기요~~ 안녕하세요?"

한 사람이 흘끗 돌아보더니 다시 하던 일을 계속했다.

"여기요~~"

더 크게 외치며 손까지 흔들자 한 사람이 건물 안쪽을 보고 뭐라고 말하는 듯했고 다른 남자가 안에서 나오더니 내 쪽으로 걸어왔다.

까무잡잡한 피부의 아랍계로 보이는 외국인이었다.

나는 문턱에 선채로 흰둥이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개 주인 아세요?"

남자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위를 찌르는 시늉을 했다.

출입구 위쪽에 있는 조립식으로 지어진 사무실 공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사무실을 떠받치고 있는 철제 기둥 옆에 흰둥이의 집과 밥그릇이 놓여있다.

"개 주인, 위에 있어요?"

확인하는 나의 질문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안쪽 작업장으로 뛰어갔다.

철제 계단을 올라가 사무실의 문을 밀치며 "실례합니다."라고 말하자 책상에서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던 여직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 동네 사는 사람인데 오며 가며 보이는 백구가 예뻐서 한 번씩 간식도 주고 들여다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며칠 전부터 백구의 발가락에 상처가 나서 피가 많이 나고 있던데 혹시 알고 계신가 해서요..."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그런 일이 있냐고,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자기는 개를 무서워해서 옆에 지도 않고 밥 주시는 분이 따로 있다고...

여기 사장님의 개냐는 나의 질문에 "아니, 뭐... 그냥 회사 개예요..."라고 얼버무렸다.

"상처가 심해요. 실례인 줄은 알지만 바쁘신 것 같아서... 제가 병원에 데려가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네? 아니 뭐 그렇게까지..."

"제가 자주 봐서 마음이 아파서 그래요. 얼른 병원에만 갔다가 다시 데려다 놓을게요."

"아니, 저 큰 개를 어떻게 데리고 가시려고..."

"남편이 같이 왔어요. 지금 밖에 있거든요."

여자는 사장에게 물어본다며 전화를 걸었고 웃으며 몇 마디 주고받더니 이렇게 말했다.

"사장님이 그러시는데요, 데려다 키우시는 게 어떠냐고요. 호호호"

난 그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지 않았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정말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요. 저 정말 개 좋아하고 백구가 너무 사랑스럽거든요. 그런데 집에 소형견이 두 마리가 있는 데다 아파트라서 같이 둘 수가 없어요. 병원 치료만 받게 하고 올게요. 가도 되는 거죠?"

뭘 그렇게 구차하게 주저리주저리 변명처럼 지껄였나 싶지만 그때는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네? 어어..."

여자의 긍정도 부정도 아닌 소리를 뒤로 하고 밖으로 나오자, 길 건너편 잡풀이 우거진 곳에 배변을 하고 기분이 좋아져서 꼬리를 살랑거리며 주변을 킁킁거리고 있는 흰둥이를 남편이 차 쪽으로 데리고 왔다.

"이제 가면 되는 거야?"

남편의 목소리가 상기되어 있고 영문도 모르는 흰둥이도 나를 보고 반가운 듯 껑충거렸다. 오른쪽 뒷발은 뒤로 쭉 뻗은 채였고 여전히 핏방울이 맺혀서 떨어지고 있었다.

차의 뒷문을 열고 있을 때 "저기요, 안 돼요!" 하는 여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 뒤를 따라 나온 여자는 사장과 다시 통화했다며 개를 그냥 놔두라고 했다.

"사장님이 와서 보시고 조치하신대요. 그냥 내버려 두세요."

"여기 좀 보세요. 바닥에 핏자국이요. 지금도 계속 피가 나오고 있어요. 남편도 와 있으니 이번 한 번만 저희가 데리고 갔다 올게요."

"아니에요. 그러다가 혹시라도 물리면 어떡하시려고요?"

"보세요, 이렇게 꼬리를 치고 좋아하는데 물다니요..."

"아니, 그래도 안 돼요. 사장님이 안된다고 하셨어요.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 그냥 가세요."

여러 번 반복해서 말했으나 여자는 요지부동이었고 하는 수 없이 우린 흰둥이를 제자리에 묶어두고 돌아서야 했다.

말하지 말고 그냥 데려가버릴 걸 그랬나? 아니야, 엄연히 주인이 있는 남의 개를 그러면 안 되지... 우리의 역할은 여기까지인 것일까? 정말 그 사람들이 병원에 데려가 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과 흰둥이의 상처가 계속 떠올랐다.


집으로 돌아간 지 한 시간 만에 나는 갑작스러운 두통으로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고 위경련으로 고꾸라져 허리를 펼 수가 없어서 응급실을 찾아갔다. 평소에 120이던 수축기 혈압이 180까지 치솟아 있었고 수액과 진통제, 진경제를 맞으면서 1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위의 통증이 멎었고 혈압은 140/90으로  내려갔다.

두통 환자에게 하는 통상적인 검사라며 뇌 CT를 찍으라는 의사의 말을 거부하지 못하고 (스트레스 때문에 일시적으로 혈압이 오른 것이 분명한데도) CT까지 찍는 바람에,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 한 시간을 더 기다린 후에야 귀가할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기진맥진한 몸으로 밤에 다시 흰둥이를 찾아갔다. 남편이 혼자 가겠다고 했으나 보고 싶었다. 당장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도 해줘야 했다. 스프레이로 된 소독약을 상처에 뿌려주고 소염제를 먹이고 사료와 껌과 물도 챙겨줬다. 다시 쓰러지면 어떡하냐고 남편은 걱정했지만, 한 번 지나갔으니 됐다고 이젠 어쩔 수 없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쉽게 잠이 들지 않아서 새벽녘에야 잠깐 눈을 붙였다.


아침에 남편이 출근한 후 흰둥이에게 가서 상처를 확인했다. 지난밤에 뿌린 소독약을 아버렸는지 발과 다리에 묻어있던 약은 흔적도 없고 털이 깨끗했다. 당장은 피가 안 나고 있었지만 바닥엔 검붉은 핏자국이 아직 마르지도 않은 상태였다.

흰둥이를 쓰다듬고 상처를 살피고 있는데 어제 봤던 사무실의 여자가 출근길에 옆을 지나치며 경직된 얼굴로 말했다. "자꾸 이러지 마세요. 신경 쓰이게..."

"어제 사장님이 보고 가셨나요?"

"글쎄 저희가 알아서 한다니까요!"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출입문을 거칠게 여닫으며 들어가 버렸다.


오후에 퇴근길에 운전을 하면서도 머릿속에선 흰둥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이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흰둥이의 앞을 차로 지나가면서 힘없이 누워 일어나지도 못하는 녀석의 홀쭉한 배와 생기 없는 눈을 보자 눈앞이 흐려졌다.

흰둥이를 지나 아파트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아래층에 사는 진돗개 흑구와 보호자인 아저씨의 모습이 보였다. 단지 아래의 마을로 산책을 나온 그 아저씨를 보자마자 갑자기 지원군을 만난 듯 반가웠던 나는 창문을 내리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흰둥이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히 했더니 아저씨는 차를 공터에 세우라고 하고는 자기 개를 공장 근처의 친한  이웃집 마당에 두고 나왔다.

"같이 가봅시다, 사무실에 다시 얘기해 보시죠."

덩치 큰 진돗개를 아파트에서 키우는 아저씨도 나만큼이나 개들을 좋아한다. 흰둥이 사연에 속이 상한 듯 담배를 꺼내 물더니 순식간에 다 피워버렸다.

내가 흰둥이를 쓰다듬고 있는 사이에 그는 곧장 출입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발은 아침에 봤을 때는 피가 멎은 듯하더니 다시 한 방울씩 맺혀서 흐르고 있었다.

1분쯤 흰둥이를 살펴본 후에 뒤따라 올라가 보니 사장인 듯싶은 중년의 남자와 아랫집 아저씨가 둥근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여직원은 옆 책상에서  컴퓨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우리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가 빈 의자를 끌어당겨 자리에 앉자 사장은 속사포처럼 많은 말을 쏟아냈다.

"제가요, 개를 엄청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아마 30마리쯤 길렀을 거예요. 시골집에서부터 키우던 개가 새끼를 낳아서...... 지금 OO지구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데 개가 너무 좋아서 주택을 지어서 이사할 계획이고요......"

그러니까 어쩐다고요, 흰둥이의 상태를 알고는 있냐고... 같은 말이 반복되고 있는 지루한 그의 말을 어디서 잘라야 할지 난감했던 나는 기회를 보다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흰둥이, 밖에 있는 백구는 어쩌다 상처가 났을까요?"

"동네에 얼마 전부터 돌아다니는 큰 개가 있어요. 그놈이 작년부터 이집저집 돌아다니고 있는 암케랑 같이 우리 개 옆에 오더니 예민해져서, 같은 수놈이라 그런지 갑자기 공격을 하더라고......"

뭐지, 그럼 진작에 알고 있으면서 그렇게 방치하고 있었다고? 목구멍에 걸려있는 그 말을 꾹 삼켜야 했다. 말하는 본새로 봐서 사장의 기분이 상했다가는 흰둥이에게 더 해가 될 것 같았다.

아랫집 아저씨도 돌아다니는 개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유난히 덩치가 큰 백구가 마을에서 이집저집 기웃거리고 있어서 동네 개들이 짖어댄다고 주민들이 하소연하더라는 것이다. 갈색 점박이 무늬의 발발이는 암컷인데 남의 마당에 들어가 묶여있는 개들의 밥을 먹으면서 지내고 몇 차례 새끼도 낳았다고 했다.

"그놈이 발정이 난 것인지 옆에 있는 놈이 아주 예민하더라니까요..." 사장이 말했다, 자기 개가 공격을 당했다는 얘기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태평하게 늘어놓았다. 눈앞에서 그냥 보고 있었다는 것인지, 어떤 대처를 한 것인지는 쏙 빠진 이야기에 토를 달고 싶지도 않았다. 한 번 입을 열면 그칠 줄 모르는 그 사람의 말을 한없이 듣고 있을 수 없어서 끼어들었다.

"지금도 발에서 피가 나고 있어요."

"아, 예, 낫고 있습니다. 제가 유심히 지켜보고 있어요. 저 사람도 잘 보고 있고요. 실은 제 집사람입니다."

그 여직원이 사장의 와이프라는 것이다. 흰둥이 발에 상처가 있는 줄 전혀 몰랐다고, 자기 개가 아니고 회사 개라고 말했던 그 여자가...

"상처가 너무 심해 보여요. 뼈가 잘리고 그대로 다 드러나 있던데요."

"아, 뭐 잘 낫고 있어요. 제가 잘 보고 있습니다."

보지만 말고 치료를 해주라고, 제발!!! 마음속으로 외칠 뿐이었다.

"너무 바쁘신 것 같은데 제가 한 번만 병원에 데려가게 해 주세요. 오며 가며 정이 들어서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래요."

나의 애원에 가까운 말에 그는 동문서답을 했다.

"아이고, 저놈이 원래 공장 안쪽에 있었는데 답답해하길래 밖에 내놨더니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아무거나 먹을 것을 줘서 살이 너무 찌더라고요. 제가 요즘 체중조절을 좀 해놨습니다."

체중조절이라고? 뱃가죽이 붙고 갈비뼈가 드러나있는데... 그 무더위에 물그릇에 물 한 방울 없을 때가 많아서 남편과 내가 페트병에 물을 담아서 가지고 다니며 부어줬다고! 속에서 외쳐대는 내 목소리가 마치 귓전에서 울리는 것만 같았다.

옆에 앉아 대화를 듣고 있던 아랫집 아저씨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입을 뗐다.

"사장님, 이번 한 번만 여기 사모님한테 맡겨주시면 안 될까요? 저도 지나다니면서 백구를 봐왔는데 그동안 쌓인 정도 있고요..."

남자는 또 엉뚱한 대답을 했다.

"이 사람 저 사람, 다들 아무거나 먹으라고 던져주고 안 되겠구먼요. 다시 공장 안으로 들여놔야지 원..."

"정말 안 될까요? 감염되기 전에 빨리 치료를 받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하는 나의 말에 그는 딱 잘라서 거절했다.

"제가 알아서 합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의 표정은 점점 귀찮고 짜증이 난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랫집 아저씨를 보며 말했다.

"이제 그만 일어서죠. 사장님께서 알아서 해 주신다니 우린 갑시다."

"사장님, 그래도 한 번만..."

내가 옷자락을 잡아끌자 그는 아쉬운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밖으로 나온 우리를 보고 반갑게 꼬리를 흔들던 흰둥이는, 먹을 것도 주지 않고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아쉬운 듯 계속 바라보며 서 있었다. 오른쪽 뒷발을 든 채로...

"미안하다, 흰둥아. 아플 텐데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아랫집 아저씨는 또 담배를 꺼내 물었다.

우린 어두운 표정으로 걸으며 한마디 씩 했다.

"나쁜 사람이네요"

 "개를 사랑한다죠?"

"잘 지켜보고 있다네요"

"저게 학대가 아니고 뭐예요?"


밤에 남편과 함께 흰둥이에게 다시 갔다. 오후의 사무실 방문에 대한 이야기를 나에게서 들은 남편은 퇴근길에 항생제 스프레이를 구해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인가 봐."

"낮엔 공장 사람들이 질색할 테니 밤에만 가서 약을 뿌려주자."

 감정적으로는 정말 학대로 신고해버리고 싶었지만 그것이 흰둥이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얼마든지 핑계를 대고 피해 갈 것이며 학대가 인정된다고 한들 흰둥이가 구조된 후에 입양되지 못하면 안락사당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남편과 주고받으며 우린 깊은 슬픔을 느꼈다.

묶인 채 공격당했을 흰둥이의 고통과 외로움, 다시 공격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런 감정들이 나만의 것일까?

당장 나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올 수도 없으면서 감정소모를 하고 있으니 한심했다.

나의 반려견들이 감당해야 하는 정서적 문제와 새로 생길 수많은 문제들 앞에서 일상을 제대로 이어가기 힘들 것이기에 더 이상의 고민을 하지 말자고 자신을 타이르며 보내는 나날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자. 그냥 야생이라고 생각하자. 떠돌이 개들도 굶주리고 다치고 싸우기도 할 것이며 강한 생명력으로 이겨내겠지.

흰둥아, 너의 강한 생명력을 믿을게. 꼭 나을 거야. 넌 잘 이겨낼 거야.

나는 그렇게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매 순간 최면을 걸 듯 나를 달래야만 했다.

매일밤 약을 뿌려주면 곧 나을 거야. 인간은 나약하지만 야생의 동물은 강하지.

흰둥아, 빨리 나아라.

넌 늠름한 진돗개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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