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이 닿으면 아픈지 녀석은 요리조리 피했지만 결국은 스프레이 세례를 몇 차례씩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료를 먹고 있을 때 등뒤에 약병을 숨기고 슬금슬금 다가가서 약을 뿌렸더니 내가 한 발짝만 떼도 자리를 이동하며 눈치를 봤다.
"안 되겠어. 밥이라도 편하게 먹게 다 먹고 나면 약을 뿌리자."
흰둥이는 아픈 와중에도 밥을 다 먹고 나면 껌을 달라고 우리 앞에 서서 고개를 들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발을 다치기 전에는 정신없이 점프를 해대고 앞발로 내 가슴에 도장을 찍어버리는 애였는데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해서 많이 소심해졌다.
남편이 껌을 주거나 목덜미를 쓰다듬는 동안 나는 재빨리 스프레이를 분사했다. 계속 발을 움직이고 피해버리기 때문에 정확히 상처 부위에 맞추는 것이 쉽지 않아 수차례 뿌려야 했다.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밤 그렇게 약을 뿌렸고 어느새 주말이 되었다.
토요일 오전에 일이 있어 나갔다가 점심 무렵에 들어온 남편이 말했다.
"흰둥이가 안 보여. 개집이랑 밥그릇까지 다 치워버렸더라고."
"정말? 사장이 정말로 공장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버렸을까?"
"설마개똥도 잘 안 치우던 사람들이 그랬을라고? 안에서 똥이 쌓이고 냄새날 텐데 정말 들여놨을까?"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오후에 흰둥이네 공장으로 가봤더니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버린 공간이 황량했다.
가슴속에 구멍이 뚫린 듯 허전함이 밀려왔다.
어떡하지, 그 녀석 발의 상처를 돌봐줘야 하는데...
밤에 강아지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가면서 다시 들러봤지만 여전히 텅 빈 시멘트 바닥만 마주할 뿐이었다.
일요일 아침.
성당에 가려고 집을 나선 나는 평소처럼 흰둥이네를 지나치면서 오른쪽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흰둥이가 있던 자리를 보았다.
그런데 그곳에 흰둥이가 있었다!
제 집이 있었던 자리에서 몇 미터 떨어져서, 대형차들이 드나드는 셔터문에 몸을 바짝 붙이고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늘 나의 차 소리에 반응하던 아이가 곤히 잠들었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차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내 마음은 분주해졌다. 시간을 보니 미사 시간이 10분 밖에 남지 않았다.
성당에 갔다 와서 볼까? 아니지 그 사이에 어디로 가버리면 어떡하나...
공단 지역을 벗어나기 전에 도중에 차를 세우고 남편에게 전화했다.
"흰둥이가 공장 앞에 와있어. 나 지금 차 돌려서 집으로 가는 중이야. 약이랑 사료, 물 챙겨서 주차장으로 내려와요. 흰둥이가 어디로 가버리기 전에 얼른 서둘러야 돼."
늦잠을 자고 있던 남편은 내 전화를 받고 허둥지둥 나왔다.
흰둥이는 우리가 바로 코앞에 다가섰을 때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럴 녀석이 아닌데, 몇십 미터 전방에서부터 우리의 발자국 소리에 펄쩍거리던 아이였는데...
아! 세상에!
녀석은 오른쪽 앞발의 발목에 새로운 상처가 나있었다.
도대체 누가!
뒷발에 이어 앞발까지 다쳐서 제대로 걷지를 못했다.
이번엔 가로로 2~3 센티쯤 예리하게 찢긴 상처였고 피는 보이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서 피가 멈춘 듯)찢어진 피부 밖으로 살점의 일부가 밀려 나와 덜렁거리고 있었다.
"미치겠네, 정말. 묶인 채로 또 물렸을까?"
나의 말에 남편이 화난 음성으로 대꾸했다.
"어떤 놈이 이 지랄을 해놓은 거지? 또 그놈인가?"
우린 많이 지쳐 보이는 흰둥이에게 물과 사료를 먼저 줬다.
1회용 플라스틱 배달그릇에 따라준 물을 허겁지겁 마신 다음 흰둥이는 사료를 먹기 시작했다.
"사료를 줘도 바로 안 먹고 먼저 쓰다듬어달라고 몸에 기대고 부비는 애였는데..."
공장 안에 묶어 두었다면 적어도 물과 밥은 줬어야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쇠사슬 고리가 풀려서 탈출했나?
목줄은 그대로 착용한 상태였다.
이제 오른쪽 앞뒤의 두 다리를 다친 흰둥이는 걷기 위해서 하는 수없이 아픈 두 발을 교대로 땅에 디뎌야 했다.
약을 몇 번 뿌려주자 절룩거리며 피하더니 길 건너편으로 가버렸다. 쫓아가면 더 멀리 차들이 많이 다니는 큰길쪽으로 도망가다 다칠까 봐 그냥 서서 바라보았다.
녀석은 빼꼼이가 우리의 소리를 듣고 컹컹 짖고 있는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우린 물과 사료를 더 부어 놓고 자리를 뜨면서 흰둥이가주변에서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와 먹기를 바랐다.
공장 안에 묶여 있다가 줄이 풀려 나온 것일까? 아니면 주인이 일부러 놓아줘버린 것일까? 돌아올 집도 없애버리고 밥그릇도 치워버리고? 상처 입은 불쌍한 아이를 설마 그렇게 내버렸을까?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줄이 풀린 것이겠지. 전에 그랬듯이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주인에게 잡혀서 다시 묶이겠지.
지금은 자유가 문제가 아니었다. 상처 입은 몸으로 어디서 물도 못 먹고 있으면 안되는거니까...
새로 생긴 상처는 뭘까? 어딘가 뾰족한 것에 걸려서 찢겼을까? 또 다른 개한테 물린 것이라면 왜 자꾸 발을 공격하지? 개들은 목덜미를 물지 않나? 덩치 큰 개가 머리를 땅 쪽으로 숙여서 발을 문다고? 그건 자신의 목덜미를 상대에게 물릴 수 있는 불리한 자세일 텐데...
나는 집까지 걷는 내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남편은 속상한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말이 없었다.
갑자기 드는 어떤 생각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그거 발발이가 문 것 아닐까? 그 암캐가 발정이 난 상태에서 예민해져서 말이야. 걔가 작아서 흰둥이의 목덜미까지 닿을 수는 없고 순간적으로 발을 공격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 쿠키도 지키는 물건이 있을 때 사랑이가 옆에 지나가면 목덜미를 물듯이 몸을 밀착해서 위협하지만, 내가 뺏으려고 하면 내 발을 물려고 달려들었어."
"왜 물어? 쬐끄만한게 설마..."
"그건 모르지. 발정 나서 예민했거나 밥그릇을 탐냈거나...
그리고 흰둥이가 우리한테는 순하지만 다부진 체격에 전형적인 진돗개잖아. 묶여 있다고 해도 다른 큰 개한테 밀리지는 않을 것 같은데? 같이 물고 싸웠으면 그놈도 상처를 입었을 거야. 작은 발발이를 봐준 게 아닐까? 암컷이기도 하고..."
"큰 놈이 물었다며?"
"사장 말은 못 믿겠어. 큰 개랑 암캐가 어울려 다니는 것을 보고 지레짐작한 것인지도 모르지. 싸우는 소리만 들은 것인지 직접 본 것인지 물어보지도 않았고..."
추측만 해볼 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당장 그날 밤을 흰둥이가 어디서 보내게 될지 걱정이었다. 아직 추운 날씨는 아니어서 풀숲이건 공장 담벼락이건 몸을 누일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걱정이 됐다.
금요일 밤엔 우리 부부가 봤으니 토요일 이른 아침에 어딘가로 이동한 것인데, 공장 안으로 옮겨졌다면 주말 내내 공장 문은 닫혀 있었는데 언제 어떻게 탈출한 것인지도 의문이었다.
일요일 아침에 만난 흰둥이. 상처의 피가 멎고 털에 묻은 피도 닦이고 보니 다행히 처음과 달리 발가락의 뼈가 잘려나가지는 않아 보였다.
일요일 밤에 다시 가보았지만 흰둥이가 왔다간 흔적은 없었다. 오전에 놓아둔 물과 사료가 그대로 있었다. 공장 근처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인데어디서 배회하고 있을까?
그래도 제 집이 있던 자리에 찾아와 밤에는 거기서 잘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물그릇과 사료그릇을 비 맞지 않도록 한쪽으로 옮겨놨다.
그날 이후 매일 차를 타고 지나칠 때마다 그쪽을 유심히 보았지만 물도 사료도 며칠 동안 그대로 있었다.
추석 연휴 기간에는 공장 문이 계속 닫혀 있었고 나는 아침저녁으로 흰둥이의 흔적을 찾으러 주변을 둘러보고 다녔다.
사료를 놓아둔 근처에는 고양이가 어슬렁거렸다.
어느 날은 공장의 벽을 따라 골목 안까지 들어가 보았지만 돌아다니는 개는 보이지 않았다. 이사 온 지 1년이 넘었지만 우리 집 방향의 도로만 지나다녔고 골목으로 들어가 본 것은 처음이다.
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을 폭의 골목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지더니 몇 개의 공장들이 흩어져 있고 넓은 공터와 집들이 보였다. 대로변에서 보이는 건물들의 뒤편의 모습이다. 연휴라서 몇몇 공장들과 마당 넓은 집들의 문이 닫혀있었고 내가 지나가는 발소리에 공장마다 집집마다 덩치 큰 개들의 우렁차게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골목 입구에는 흰둥이네 공장 벽면에 딱 붙은 노인회관 건물이 있었고 지면에서 시멘트 계단을 몇 칸 올라가야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
계단 위로 올라가서 내려다보니 흰둥이네 공장의 넓은 내부가 보였다. 커다란 기계설비실 같은 것이 가로막아서 건너편은 볼 수 없었지만, 내가 사무실에 방문했을 때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던 공간이다.
그곳에는 흰둥이의 흔적이 전혀 없었고 공장 안 어디에도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실망감과 걱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어디서 방황하고 있는 것일까?
공장 안쪽 더 깊숙한 곳에 있는 걸까?
아니면 다른 곳으로 보내버린 것일까?
안전하게 지내고 있는지, 잘 먹고 있는지, 발의 상처는 어떻게 돼가고 있는지...
연휴 동안 매일 주변을 둘러보고 개집이 있었던 근처에 놓아둔 사료와 물을 확인했지만 그대로일 때가 많았다.
어쩌다 근처에서 고양이를 발견할 때면 사료 그릇이 비어 있기도 했다.
흰둥이를 마지막으로 본 날로부터 2주가 지났다.
공장 주변에서 돌아다니고 있다면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을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딘가 다른 곳으로 보내진 것이 틀림없다고 그만 찾으라고 말하는 가족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이 더 크다.
내가 아는 척하지 않았다면, 병원에 데려가겠다고 나서지만 않았다면, 흰둥이는 늘 있던 그 자리에서 우리와 만나고 매일 약을 뿌려줄 수도 있을 텐데...
나 때문에 더 나쁜 환경에 유배된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는 나에게 남편은 말한다.
그 자리에 있으면 계속 공격을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동물의 세계에서 약한 개체는 계속 공격을 받는다고... 묶여있는 데다 상처 때문에 제대로 방어도 못 하는 녀석이 더 심하게 다칠 수도 있었다고...
그러나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에서 운영하는 동물보호소의 공고란을 확인해 보았다.
흰둥이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날짜부터 구조된 개들의 수많은 사진들을 들여다보던 중 흰둥이와 많이 닮은 백구를 발견하고 심장이 덜컹하는 소리가 들렸다.
발견 장소가 내가 사는 동네에서 차로 10분 거리였다. 공격성으로 인해 안락사되었다는 내용을 읽고 허둥지둥 사진을 확대해서 보았다. 주둥이 모양이 좀 더 뭉툭하지만 많이 닮았다. 사진 각도와 거리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 보일 수도 있다. 발을 확대해서 보았다. 뒷발의 발가락이 상처 없이 가지런하다. 모든 발가락들의 사이가 틈이 벌어져 있다. 흰둥이는 발가락들의사이가 더 가깝다.
내 기억에 오류가 있나 싶어, 전에 찍어둔 흰둥이의 사진과 동영상을 몇 번이나 확인하며 비교했다. 목줄도 다르다. 흰둥이의 오래되어 닳은 갈색 목줄이 아니고 초록색의 튼튼한 새 목줄이다.
사진 속 맑은 눈을 바라보며 안락사되었다니 너무 불쌍해서 눈물이 나면서도, 그래도 흰둥이가 아닌 것에 안도하게 되는 나는 얼마나 모순 덩어리인가...
매일 흰둥이를 염려하는 나를 본 딸이 연휴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면서 말했다.
만약에 흰둥이가 보호소의 공고란에 올라오면 데려다 키우자고, 다른 개에게 경계심이 너무 심한 사랑이는 서울로 데려가 키우겠다고.
마지막으로 본 날, 내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드는 흰둥이. 밤새 저 자리에 있었을까?
개를 입양한다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사설 유기견 보호소에서 데려온 우리 집 강아지들은 남매임에도 불구하고 합사 하는데 어려움과 각자의 습성에 따른 문제들이 있었고 지금도 외부인에 대한 심한 경계와 짖음 때문에 어려움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흰둥이가 어디서든 안전하게 잘 지내는 것과 상처가 잘 낫길 바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