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부활
책의 5장에서 저자는 세계화된 사회에서 확산된 주장에 의하면 공간은 점차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여겨져 왔다는 점을 지적한다. 공간과의 결별을 표현하는 문구로서는 '거리의 소멸', '시공간 압축', '지리학의 종말', '공간의 종말' 등 수많은 말들이 학계에서 난무하였다. 이와 더불어 탈영토화, 무장소성, 공간의 폐기나 파괴와 같은 개념들은 인터넷의 등장으로 활력을 얻었지만 인터넷 이후 등장한 새로운 개념은 아니었다.
이런 개념들은 늘 새로운 운송매체와 통신매체의 등장을 알리는 일종의 시대적 신호였다. 증기선과 증기기관차의 등장과 더불어 전자기를 활용한 전신기의 발명자인 새뮤얼 모스는 1837년 전신기가 공간을 극복하고 미국 전역을 하나의 이웃으로 변화시킬 것이라고 확신했다.
한국에서도 고속전철이 등장하면서 전국은 일일생활권으로 변모하였으며, 이것은 소위 시공간의 압축 현상으로 표현될 수 있다. 공간의 비중이 약화된다는 명제는 근대성 이론 전반에 각인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구의 저명한 사회과학자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공간의 역할이 점점 줄어든다고 말했다. 그러나 탈근대화 과정에서는 반대로 공간의 귀환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저자는 <공간적 전회>가 '탈근대의 산물'이라고 정의한다. 미셀 푸코는 우리가 '공간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마뉴엘 카스텔은 더 나아가 "공간이 시간에 지배당할 것이라고 가정한 대다수의 전통적 사회이론들과 달리 나는 네트워크 사회에서는 공간이 시간을 조직한다는 명제를 제기한다."라고 선언한다.
그러면 현대 사회에서 특히 탈근대화의 조류 속에서 사회이론가들이 다루는 공간은 어떤 것일까? 그것들을 저자는 여섯 가지 공간 개념으로 분류한다. 1) 지리적 공간-사회적 공간: 사회학에서 공간과 거리를 두는 이유는 공간이 일차적으로는 자연적-물질적 공간, 거리와 교통로의 공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공간이 사회적 맥락에 관련될 때만 공간은 사회적으로 생산된 것임을 사회학자들은 강조해 왔다. 그러나 이 둘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을 우선 명시해야 한다.
2) 컨테이너 공간-상관적 공간?: 요즘의 공간 논의에서는 지리적 공간과 사회적 공간의 차이 이외에도 절대적인 공간과 상대적인 공간의 구별도 중요시한다. 컨테이너 모델이란 공간이 사물과 인간을 수용하고 이들을 위한 고정된 자리가 있는 그릇이라고 보는 고대부터 잘 알려진 공간관이다. 이 모델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가 나온 후부터는 상관적인 공간 모델과 대립하게 되었다. 상관적 공간관에 의하면 공간과 공간의 내용물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란 속담처럼, 상관적 문화 공간에서 까마귀와 까마귀-공간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3) 사회-공간: 앙리 르페브르 이후 일반화된 관점에 따르면 공간은 자연적으로 항상 주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생산된다. "사회적 공간은 사회적 생산물이다." 여기에서 자연적 공간은 단순한 배경으로 전락한다. 르페브르는 공간적 실천, 공간의 재현, 재현 공간을 구별하여 자연적 공간과 사회적 공간이라는 이원적 도식에서 탈피한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이 책이나 르페브르의 책을 참조하기 바란다.
4) 공간-사회: 공간적 환경은 사회적 현상에 영향력을 끼친다는 사실을 현대의 사회학자들은 거부해 왔다. 그들은 소위 공간결정론적 사고에 대하여 반대하며 공간과 사회의 상호관계를 강조한다. 모리스 알박스는 사회형태론에서 "장소는 집단의 특성을 간직하고 반대로 집단은 장소의 특성을 간직한다."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행위와 소통은 공간적 배치의 영향을 받고 미리 구성된다. 예를 들면 주요 세미나를 노천에서 열 수도 있지만 그 진행방식은 강의실과 다르게 준비되어야만 할 것이다.
5) 공간-시간: 전통적으로 공간의 대항자는 시간이었다. 시간은 옛날부터 이동성, 역동성, 진보, 변화, 발전, 역사와 연결되는 반면, 공간은 부동성, 침체, 반동성, 정지, 불변, 고정을 대변한다. 하지만 현재적으로 발견된 현상은 공간 속의 사물만이 아니라 공간 자체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현재 공간은 움직이고 있는 반면 시간은 정지한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건축에서는 단일 기능이 아닌 다기능을 추구하는 일종의 이동식 건축이 등장하고 있다. 더 나아가 초국가적 가상공간에서도 이런 <흐름의 공간>이 발생한다.
6) 공간적 전회: 현대 사상의 흐름에서 <언어적 전회>의 대체어로 <공간적 전회>라는 말이 많이 거론되고 있지만 아직 모든 분야에 일반화되어 있다고 보기엔 이른 감이 있다는 사실을 저자는 강조한다. 그러나 이 전회는 우선 사회과학적으로 볼 때 보편화된 일부 추세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회적 현상을 사람들의 관계로 한정시키는 경향에 맞서서 대상들의 관계가 강조되었고, 텍스트의 우위에 맞서서 이미지의 의미가 지적되었고, 의식을 강조하는 추세에 맞서서 다시 신체를 언급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여러 분야에서 공간적 전회는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