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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와 예수 3

백색 전설의 철학적 함의

by 박종규

05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아감벤이 사용하는 백색 전설(white legend)의 유래와 그가 왜 이 책의 중심 개념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는 철학적 이유를 먼저 알아보자. 역사적으로 백색 전설(Leyenda blanca: 스페인의 남미 지배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역사 서술 방식)은 스페인이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고 그곳에 서구의 문명과 기독교를 전해주었다는 스토리텔링을 말한다. 일본의 조선 침략 역시 백색 전설 즉 한국의 근대화와 산업화의 기초를 일본이 마련해 주였다는 식으로 일제강점기의 한국인 교육이나 일본 내 동아시아 역사 교육을 왜곡하는 선전과 같은 것이다.


아감벤의 경우에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로마인들의 자기 정당화 즉 빌라도가 예수의 죽음에 대해 무기력함과 주저함을 정당화함으로써 나중에 국교가 된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 사건에 '정치적 책임을 유보하는 주권자의 원형'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나아가서 이 백색 전설은 무죄를 주장하면서 폭력을 행사하는 근현대 권력의 자기 서사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 정도로 이해하고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자.

저자는 05의 서두에 백색 전설은 성서 이외의 다른 전승에서 말하는 빌라도의 모습과 눈에 띄게 대비된다고 한다. 유대인 철학자 필로는 [가이우스에게 보내는 사절]에서 빌라도를 유대인들이 신성모독으로 여기는 행동(헤롯의 궁전에 금칠한 방배를 설치하여 황제에게 헌정함)을 한 사람으로 언급하면서 그를 '고집스럽고 변덕스러우면서 잔인하기까지 한 자'로 묘사한다. 더 나아가 빌라도를 '비열하고 성마른 자'로도 묘사한다.


이러한 특성은 빌라도를 흑색 전설(Leyenda negra: 백색 전설과 반대로 특정 인물이나 세력을 악마화하는 역사 서술, 예를 들어 영국과 네덜란드의 신교도 세력이 남미에 수립된 가톨릭 왕정을 악마화한 반스페인적 흑색선전)이 주인공으로 만든다. 이 흑색 전설은 흥미롭게도 베로니카라는 인물의 거룩한 전설과 대배된다.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미하일 불가코프(1892-1940)는 [거장과 마르 가리타]란 작품에서 로마 황제가 시종을 빌라도에게 보내서 예수를 찾아 보내도록 명한다.

시종이 황제의 명령을 전하자 빌라도는 '크게 당황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질투심에 휩싸여 예수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리곤 빌라도는 이렇게 둘러댄다. '그는 범죄자였소. 그래서 나는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명령을 내렸소.' 숙소로 돌아온 시종은 베로니카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여인을 만난다. 그녀는 예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 그분은 저의 하나님, 저의 주님이셨습니다. 빌라도가 그분께 사형을 언도하고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었습니다.. 나는 그분의 초상을 그리려고 화가에게 아마포를 가지고 가다가 그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거룩한 얼굴이 찍힌 그 수건을 돌려주셨지요. 당신의 주인이 경건한 마음으로 그림을 바라본다면, 곧바로 건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시종은 베로니카와 함께 로마로 돌아와서 황제에게 예수라는 의사는 질투심에 눈먼 빌라도와 유대인들에 의해 부당한 죽임을 당했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황제는 빌라도를 포박하여 로마로 압송하라 명한다. 빌라도는 예수의 '바느질되지 않은 옷(요 19:23)' 즉 거룩하고 순결한 옷을 입고 황제 앞에 선다. 그 순간 황제의 분노는 사라졌고 그는 빌라도에게 죄를 물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를 다시 부른 황제는 옷을 벗기라고 명하고 빌라도의 본모습을 본 황제는 그를 옥에 가두고 그런 다음 치욕스러운 죽음을 맞도록 하였다.


사형 언도 소식을 들은 빌라도는 비수를 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그의 시체는 거대한 맷돌에 묶여 티베리우스 강에 던져졌다. 이 지점에서 흑색 전설은 뒤죽박죽으로 엉켜버린다. 어떤 전설은 귀신 들린 시체가 이 무덤에서 저 무덤으로 정처 없이 떠돌았다는 이야기와 그 강에서 시체를 꺼낸 로마인들은 경멸의 표시로 론 강에 다시 내던져졌다고 되어있다. 론 강에서 빠져나온 사악한 귀신은 다시 저주를 뿜어냈고, 사람들은 그 시체를 산속의 깊은 우물에 잠기게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이 우물에서는 아직도 사악한 기운이 부글부글 들끓고 있다고 한다.

06에서 아감벤은 다시 복음서의 빌라도로 돌아간다. 그의 핵심 물음은 다음과 같다. '이 유대 총독은 도대체 왜 예수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썼던 것일까?' '그리고 도대체 왜 빌라도는 뜬금없이 유대인들에게 굴복한 것일까?' 저자는 재판 과정에서 빌라도가 보인 태도가 이중적이었든 간에 재판은 총독이 주재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재판 과정을 가리키는 그리스어는 크리시스 (krsis, 가르다, 결단내다는 의미를 가진 krino에서 유래)이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종말론적 심판의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예수는 <심판의 날(en emerai kriseos)>에 대하여 수차례 경고했고, 바울은 로마서 2장 16절에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그날(en emerai ote crinei)>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이 단어는 복음서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복음서에서 저자들이 쓰는 단어는 베마(bema: 재판관이 앉은 의자 혹은 서는 연단)를 가리킨다. 예수에게 판결을 내릴 때 빌라도도 베마에 앉아 있었다.

바울은 베마를 최후의 심판을 가리키는 비유로도 사용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베마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고후 5:10)"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서로를 판단해서는 안 되는 인간들 사이의 재판과는 전혀 다르다. "당신들은 어찌하여 당신들의 형제를 판단하십니까 ti krineis?... 그러나 우리 모두 하나님의 베마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롬 14:10)"


아감벤은 빌라도가 주재하는 재판에는 두 개의 베마 즉 두 개의 심판 그리고 두 개의 왕국이 맞서 있다고 해석한다. '즉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이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의 몰락]이란 책으로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이 대립을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필치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가 빌라도 앞으로 끌려나갔을 떼, 그곳에서는 사실의 세계와 진리의 세계가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직접 맞서 있었다. 경악스러울 정도로 선명한 압도적인 상징성을 가진 이 장면은 세계사를 통틀어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이 장면에서는 사실의 세계가 진리의 세계를 재판하고, 지상의 왕국이 영원한 왕국에게 판결을 내린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 결정적인 대결, 어떤 의미에서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이 역사적 크리시스의 과정에서 발생한 모든 세부 사항들이 하나하나 주의 깊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과연 '세계사적으로 유일한 사건이라는 것'은 근대 이후의 세계를 기독교 문명이 주도하던 시대에 국한된 것은 아닐까? 아감벤이나 슈펭글러 역시 여전히 서구중심적 사고에 머무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들의 시각에서 그 특별한 재판은 다원화된 오늘날의 세계에도 보편적 의미가 있는 재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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