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의 복음서는 통상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공통 관점을 가진 복음)와 요한복음서(제4복음서)로 구분된다. 요한복음을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시간 순서대로 기록하는 공관복음과 달리 특정 사건 혹은 표적(sign)과 대화(dialogue)를 중심으로 서술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선 요한복음이 7가지 의 장면(장면이 바뀌면 장소도 변함)으로 나누어서 기록된 일종의 극본으로 이해한다. 빌라도와 예수의 대화는 이른 아침(요 18:28)에서 시작되어 제6시까지(요 19:14) 다섯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아감벤은 이 다섯 시간 동안 빌라도와 예수의 대면과 대화를 7가지 장면으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1) (관저 밖) 빌라도가 밖으로 나온다. 이는 예수를 관저로 끌고 온 사제들이 유월절 축제를 앞두고 더럽혀질 것을 두려워하여 관저 안으로 들어가길 꺼렸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묻는다. "당신들은 어찌하여 이 자를 고소하는 것이오?" 이 질문에 유대인들은 구체적인 이유를 대지 못하며 두리뭉실한 이야기로 둘러댄다. "이 자가 범죄자가 아니라면, 우리가 당신께 끌고 왔겠나이까?"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피고를 다시 데려가 "당신들의 법에 따라" 처리하라고 명하는데, 이 역시 절차에 따른 것이었다. 로마법에 따르면 고소가 합당한 형식을 갖추지 못한 경우 재판이 열릴 수 없기 때문이다. 로마법전에 따르면 '내란죄는 로마 제국의 신민과 그의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우리에게는 사형을 집행할 권리가 없습니다"란 말로 빌라도의 마음을 돌려세운다.
2)(관저 안) 처음으로 빌라도와 예수가 만난다. 빌라도가 예수에게 말한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는 대답한다. "당신이 스스로 그 말을 생각한 것이오? 아니면 다른 이들이 당신 앞에서 나를 그렇게 부른 것이오?" 빌라도는 대꾸한다. "내가 유대인인 줄 아느냐? 너의 동족과 고위 사제들이 너를 내 앞으로 끌고 오지 않았느냐? 너는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여기서 <유대인의 왕, basileus ton loudation>이라는 표현(sintagma)이 처음 등장한다. 저자는 예수가 빌라도의 질문을 제대로 이해 못 했다고 유추한다. 그 이유는 로마 제국의 총독이 메시아에 대한 기대 같은 유대 민족 내부의 문제 따위에 신경을 쓸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나의 왕국의 이 세계의 것이 아니다. 내 왕국이 이 세계의 것이었다면, 내가 유대인에게 붙잡혀 올 때 (백성들이) 나를 위해 싸우지 않았겠느냐? 그러나 나의 왕국은 이 세계에 있지 않다." 아감벤의 해석에 의하면 이 대답은 애매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가 왕권을 부정하는 동시에 주장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에 이르는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 애매성에 주목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가 '이 세계 안에 있지 않다 non est in hoc mundo'고 말한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 의한 것이 아니다 de hoc mundo'로 말한 것으로 이해했다.
아퀴나스는 이 말을 그것이 지상의 어떤 힘이나 인간들의 선택에 의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힘, 즉 아버지의 힘에 의해 세워진 것임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나의 왕국이 여기에 있지 않다고 말했을 때, 그분의 당신의 왕국이 이 세계에 근원을 두고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여기에 두고 있음을 뜻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왕국은 모든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추론 역시 로마 제국의 통치 이데올로기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정치신학자의 해석으로 볼 수도 있다.
대화는 이제 왕국에서 진리로 넘어간다. 빌라도는 니체가 모든 역사를 통틀어 가장 세련된 말이라고 부른 질문을 던진다. "진리가 무엇이냐 ti estin aletheia?" 이 질문은 재판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이질적이다. 아퀴나스의 주석에 의하면 예수의 왕국이 이 세계와 관련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 빌라도는 진리를 알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즉 빌라도의 질문은 보편적 진리가 아니라 예수는 알고 있는 듯한데 자기에겐 가리어져 있는 특수한 진리를 겨냥한 것이었다는 말이다.
빌라도의 이 질문에 대한 예수의 즉각적 답은 기록되지 않았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이미 예수는 "자기 자신이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빌라도에게는 그런 답이 통하지 않을 것을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 이제 아감벤은 세 번째 장면을 제시한다. 아감벤의 이런 서술 방식은 마치 5시간(혹은 6시간) 내에 벌어진 어떤 사건을 시나리오나 각본으로 구성하는 기법과 유사하다. 아마 이탈리아에서 발달한 신사실주의 영화(대표적으로 자전거 도둑)의 표현 양식이 그에게 영감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3) (관저 밖) 이제 빌라도는 다시 관저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요 18:38-9)" 이 장면에서 저자는 만약 빌라도가 예수에게 죄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로마 재판법상 이 절차는 무죄 선언을 하고 추가 조사를 지시할 수 있었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를 되묻는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거센 압박에 굴복했을 때도 아무런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단지 유대인에게 피고인을 '넘겨주었을 paredoken'을 뿐이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빌라도는 예수를 잔인하게 고문했다. 유대인들은 그의 기대를 배반했다. 마태복음에서는 빌라도가 손을 씻는 일화가 등장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 27:24)"
4) (관저 안) 관저 안으로 들어온 빌라도는 최후의 시도를 감행한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요 19:1-3)" 아감벤에 의하면 채찍질은 당시 관습으로는 죄인을 십자가에 매달기 전에 가하는 부가적인 형벌이었다고 한다. 그는 추측하기를 아마도 빌라도의 재량권 내에서 그런 지시를 한 것이고, 누가복음의 기록을 보면 빌라도가 채찍질을 가한 다음 방면하려는 의도를 가졌다고 되어있다.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눅 23:22)"
아감벤이 이렇게 예수의 재판 과정을 재구성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그의 의도가 예수의 재판 과정이 단순히 한 인간의 사법적 사건이 아니라, 영원한 것(신의 왕국)과 시간적인 것(로마 제국)이 충돌하고, 사실과 진리가 충돌하는 역설적인 만남의 장으로 제시하려는 것을 지속적으로 인지할 필요가 있다. 5) 이하와 08에서 <요한복음의 빌라도>란 주제는 여전히 계속된다. 길어지니 이 편에서는 여기까지 읽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