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아감벤이 재구성한 빌라도와 예수에 대한 장면 5-7을 살펴보자. 5) (관저 밖) 빌라도는 밖으로 나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요 19:4)" 그때 예수는 가시면류관을 쓰고 홍포(자색옷)를 걸친 채로 밖으로 나왔다.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 crown of thorns을 쓰고 자색 옷 purple robe을 입고 나오시니(요 19:5)" 이 장면을 가장 사실적으로 재현한 영화는 단연코 2004년에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배우 멜 깁슨이 만든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The Passion of the Christ >이다.
로마 병정들이 예수의 머리에 씌운 가시 면류관은 로마인이 보기에 예수가 진정한 왕이 아니라는 일종의 조롱과 수치를 상징하지만, 그 후의 신학자들은 이를 인간의 죄로 인한 고통과 수치와 불안을 대신하여 짊어지는 상징으로 그리고 자색은 당시에 왕들이 걸치는 상징적인 색이었기에 자색 옷은 역설적으로 예수가 왕 중 왕 즉 참된 왕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계시로 해석했다. 5절에 나오는 그다음의 구절은 기독교 문화 특히 여러 장르의 예술에서 가장 많이 표현된 소재의 제목으로도 유명하다. 니체는 반기독교적인 자기 자서전의 제목을 [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라고 붙였다.
다시 아감벤의 묘사로 돌아가자. 빌라도는 이때 유대교 지도자들과 그 일행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ecce homo 하매(요 19:5)" 그러자 그들은 한결같이 외쳤다. "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요 19:6)" 이를 들은 빌라도의 대답은 "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19:6)"이었다. 즉 그는 예수의 죽음에 자신의 책임이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요 19:7)"이라고 소리친다.
아감벤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구약의 레위기 24장 16절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에 근거한 것이며, 이는 요한복음 5장 18절에도 기록이 되어있다고 고증한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유대인들 특히 당시의 종교적 지도자들은 당연히 자신들이 할 일을 한 것이다.
19절 이하에서 예수는 구약의 율법에 매인 유대인들이 듣기에는 더 참람한 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39절과 40절은 오직 신(여호와)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유대교의 신앙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신과 인간이 엄격히 분리되어 있으며 인간이 신을 대신할 수 없다는 신앙>에 기초하고 있다. 과연 예수는 신인가? 인간인가? 오랜 논쟁을 통해서 황제가 손을 들어준 예수는 참 신이자 참 인간이고, 참 인간이자 참 신이라는 교리이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양성론>이라고 말한다. 논리적으로는 완전히 모순인 개념 즉 둥근 사각형, 사각난 원과 같은 이 개념을 인간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나 고대인들에게는 특별히 희랍 문화권에서는 가끔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에 이 교리는 로마 제국 내에 별로 거부감 없이 퍼지게 되었다.
6) (관저 안) 이제 빌라도의 태도는 더욱 분열적으로 된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서 온 것이냐 pothenei sy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요 19:8-11)"
아감벤은 이 구절의 핵심을 <너는 어디서 온 것이냐?>라는 불안하고 초조한 빌라도의 질문에 둔다. 이 질문은 앞의 대화 즉 왕국이나 진리에 대한 대화와 관련되는 것이다. 그에 해석에 의하면 겉으로 전혀 줏대 없어 보이는 빌라도의 질문은 계속하여 진리를 확인하려는 노선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 위에서' 온 것이라는 예수의 대답을 예수가 무죄라고 확증하는 것으로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요 19:12)"
7) (관저 밖) 마지막 장면: 야외. 유대인들의 협박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요 19:12)"에 굴복한 빌라도는 결국 예수를 유대인들에게 넘겨주고 만다. 그 이후 그가 가바다(돌을 깐 들)에 있는 재판석에 앉은 장면은 앞에서 벌어진 빌라도의 예수에 대한 심문이 어떤 지위를 갖는지에 대한 결정적 증거가 된다. 실제로 예수와 빌라도가 앞에서 나눈 대화는 그저 사적인 대화였을 뿐 어떤 형법 절차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빌라도는 마지막까지 예수의 왕권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한다. 그러자 유대인들 특히 산헤드린의 지도자들의 대답은 더욱 이중적이다. "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요 19:15)" 왕권에 관한 문제는 빌라도가 십자가 위에 써놓도록 한 칭호와 더불어 다시 논란의 핵심이 된다. "INRI, IESVS·NAZARENVS·REX·IVDÆORVM,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19:19)" 이 문구는 처벌 근거를 명시함으로써(마 27:37 참) 그의 왕권을 확증한다.
이제 아감벤의 세세한 장면 묘사와 해석은 08의 주제인 <넘겨두다, 파라도켄, paredoken>에 대한 철학적 분석으로 이행한다. 그가 보기에 요한복음 혹은 다른 복음서에도 예수의 수난 이야기에서 핵심은 '인계(引繼, consegna)' 즉 본래적 의미에서 '넘겨줌 tradizione'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인인 저자가 읽으면 불가타 성서(라틴어 번역 성서)에서 이 동사가 연속적으로 사용된 것은 어떤 각운, 압운(押韻: 한자로 된 시의 각 구 마지막 글자의 운모가 같은 한자들끼리 짝을 이루는 것을 의미)이 느껴질 정도라고 한다.
복음서에서 예수를 유대인들에게 넘겨준 제자 유다는 예수를 '넘겨준 장본인, 즉 최악의 배신자(요 18:5)'이다. 여기서 배신자의 라틴어 성경 단어는 tra-ditore이다. 마찬가지로 마가복음 3장 7절에는 희랍어로 같은 뜻인 '유대 이스카리오트, 그분을 넘겨준 자 hos kai paredoken auton'이고, 마태복음 10장 4절에도 '그분을 넘겨준 사람'이라 적혀있다.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마 29:2)"과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막 15:1)"에서는 유대교 지도자들과 그 추종세력들이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고 기록한다.
아감벤은 신학자 칼 바르트 역시 '인계, 넘겨줌 consegna'라는 이 말에 신학적 함의가 들어있다고 지적한 예를 든다. 왜냐하면 이 지상에서 예수가 인계되기 앞서 이미 하늘에서 인계가 이루어졌기 때문인 것이다. 진리(계시)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뜻인 십자가 사건은 사실(역사)의 차원에서 빌라도의 승인 아래 거행된 것이다. 바울은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22)"
과연 십자가로 가는 길이 예정된 예수의 심정은 복음서에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골고다 이전과 골고다의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 사이에는 역설적인 긴장이 존재한다.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막 9:31)"과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시니라(마 16:4)" 그리고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 3:14)"와 같은 구절에서 예수는 분명히 골고다로 가는 자신의 예정된 여정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요한복음을 제외한 공관복음에서 이미 예정된 골고다의 처형이 가까워지자, 예수는 십자가 사건을 피하게 해달라고 자신의 아버지 하나님에게 간청하고 있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민이 되어 죽게 되었으니 함께 깨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애절하게 기도한다. 누가복음 22장 42절과 마가복음 14장 36절에서도 같은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
예수의 이런 기도는 그전에 자신의 죽음을 이미 알고 담담하게 예언한 예수와는 너무 다른 이미지를 보여준다. 구약에서 요나의 표적(고래 배 속에서 다시 살아남)은 신약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미리 상징한다. 이 말대로라면 그는 자신이 처형되고 다시 살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골고도 앞에서는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했을까? 그리고 최종적으로 십자가 위에서 예수의 마지막 일곱 가지 말들 중 가장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는 말이 공관복음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막 15:34)"
아감벤은 결론적으로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에 관한 모든 사건과 언행이 신의 계획 즉 신학자들이 <구원의 경륜 economia della salvezza>이라고 부른 예정된 계획의 확정된 시나리오에 따라 펼쳐졌다고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그가 이런 신학자들의 견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나아가서 이 드라마의 배우들은(유다나 빌라도나 종교지도자들과 군중을 포함해서) 그저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해냈을 따름이다. 이 드라마의 마지막 역시 '넘겨줌'으로 구성되어 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눅 23:46)"와 "영혼이 떠나가셨다(요 19:30)"라는 말로 대단원의 마지막을 묘사한다. '떠나가셨다'의 희랍어 paredoken to pueuma의 불가타 역은 <tradidit spiritum(영을 넘겨줌)>이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이런 시나리오설에 대하여 아감벤보다 더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철학자인 지젝의 비판을 살펴보고 마치기로 하자. 지젝은 [죽은 신을 위하여]라는 저서에서 신학적 시나리오설을 강하게 비판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필수적인 구원의 계획의 일부였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 의지와 실존적 결단의 사건이 아니라, 단순히 대본에 따른 연기에 불과하게 된다. 십자가 사건이 <미리 예정된 시나리오>였다면, 십자가로 가는 길과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가 표현한 고통과 절규는 거짓된 감정이며, 신의 영광을 위한 잔인한 연극이 되어버린다.
더 나아가 그 모든 서사가 신의 시나리오라면 예수의 모든 말과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 사건은 일종의 기만(hoax)이다. 지젝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십자가 사건에서 예수가 경험하는 신과의 단절과 절대적인 절망의 순간이며, 이 순간이야말로 신의 전능함과 아버지-권위가 일시적으로 죽음을 경험하는 '죽은 신'의 순간이며,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혁명적인 핵심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