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에서 아감벤은 우선 복음서가 어떤 종류의 텍스트인지에 대한 논쟁으로 시작한다. 오랫동안 복음서는 역사적인 자료인지 아니면 순수하게 신앙적(혹은 신학적 문제를 다루는) 텍스트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어왔다. 아마 현대인들 대다수는 복음서에 기록된 여러 가지 초자연적 현상들은 문자 그래로 믿는 사람은 아주 독실한 보수적 기독교인 이외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오직 그것들의 재현 불가능성 때문이다. 우리가 오늘날 진보된 과학을 신뢰하는 이유는 물리적 법칙이나 화학적 법칙은 재현 가능한 현상으로 환원(검증/반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신자가 아니었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인 포르티리오스는 이미 3세기에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에게 일어난 일을 기록한 역사가(historas)나 증인(testimoni)이 아니라 그것들을 꾸며낸 자(epheurotas)들"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쓴 것은 자체로 모순적일 뿐만 아니라 서로 들어맞지 않는다. 특히 수난 이야기에 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의 이런 견해는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실증주의 역사가 혹은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에 의해서도 반복되었다.
13에서 저자는 예수 재판의 마지막 장면의 해석을 두고 더 복잡한 층위가 겹치게 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빌라도는 예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재판석에 앉았다(ekathisen epi tou bematos)." 이 구절의 해석에 대하여 초기 기독교 변증가인 유스티노(순교자 저스틴)나 근대의 자유주의 신학자 하르낙과 같은 학자는 ekathisen은 타동사 transitivo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제대로 된 번역은 "그는 예수를 데리고 나가 그를 재판석에 앉혔다"라는 것이다. 재판석에 앉은 사람이 빌라도에서 예수로 바뀌는 것이다.
예수가 베마(재판석) 위에 앉았다는 사실은 마가복음이나 마태복음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바기 전에 홍포(자색옷)를 걸치게 하고 마치 왕의 홀(지팡이)처럼 갈대를 쥐고 있게 한다. 예수를 마치 유대인의 왕처럼 모시는 시늉을 한 것이다. 유스티노에 의하면 예수를 베마에 앉힌 유대인들은 오직 왕만이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부려보라고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우리를 심판하소서!' 이게 사실이라면 앞서 진행된 5시간의 대화나 제6시에 일어난 사건 역시 어떤 형법 상의 효력도 가질 수 없게 된다.
아감벤은 이런 해석의 갈등을 실제로는 종결되지 못한 두 개의 재판이 서로 맞서서 있다고 이해한다. 정말로 재판을 주재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결코 알 수 없다. 세속 권력에 의해 적법하게 임명된 재판관인가 아니면 이 세계의 것이 아닌 왕국을 다스린다며 조롱당한 재판관인가? 사실 세속법 역시 해석의 차원에서 판정된다. 대부분 법적 해석의 근거는 판례에 의거하는데, 이 판례 역시 시대가 바뀌면서 조금씩 변한다. 그리고 입법을 통하여 새로운 법들이 정해지고, 이 새로운 법이 순수하게 국민 모두의 공익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다수 혹은 일부 정당의 권익을 위한 법인지를 구별하는 것은 그 당시에서는 애매하다.
이제 저자는 복음의 본질이 심판(재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있다는 것을 다시 일깨운다.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me krinete(마 7:1 새번역)" 이것은 로마서에서 바울이 반복했던 경고이기도 하다. "판단하지 말라 me krineto(롬 14:3 개역한글)" 이 금지 명령의 신앙적 토대를 요한복음보다 더 정식화한 글은 없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 ina krine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 ina sothe이라(요 3:17)" 이렇게 복음서에서는 영원하신 그분이 이 세계를 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려 한다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다.
아감벤은 또다시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판단하지 않는 자가 재판관의 판결에 굴복해야 하는 까닭. 영원한 왕국이 이 지상의 왕국이 행하는 재판에 넘겨져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철학자는 까다롭다. 그리고 너무 집요하게 문제의 근원을 파헤치고 또 파헤친다. 사실 파헤쳐서 무엇이 나올지는 그 자신도 모른다. 저자는 15로 넘어가서 단테가 [제정론: 정교분리를 주장한 정치 철학 저서]에서 빌라도를 언급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단테가 빌라도를 언급한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제국의 대리인이 내린 판결을, 그리고 그리스도 정신의 왕국과 로마의 지상 제국을 화해시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빌라도가 정당하다고 주장해야 했다. "로마제국이 법에 기초하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도는 아담의 (원)죄을 대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과연 그의 이런 해석은 시대적 요구에 의한 것이었기에 다른 시대에서 혹은 다른 문화권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납득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빌라도 자체도 모순이지만 그리스도 역시 모순이다. 이 담론은 16에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