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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와 예수 10

'진리를 증언한다'는 것의 의미

by 박종규

18에서 저자는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인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천재와 사도의 차이에 관하여]라는 짧은 논문 속에 기술된 <진리의 증언에 대한 실존철학적 해석>을 인용한다. 키르케코르는 여기에서 “증언은 권위를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증언은 심오하고 천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증언은 또한 스스로를 입증할 자료를 제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물리적인 fisica 확실성을 요구하는 것'은 난센스이기 때문이다... 권위는 특별한 성질을 갖는다. 권위는 다른 곳에서 도래하는 것으로서, 말이나 행위의 내용이 무의미해지는 바로 그 순간에 눈에 띄는 효력을 발휘한다.”라고 기술했다.


키르케고르의 이런 말을 이해하려면 그의 <역설의 변증법>을 먼저 이해해야만 한다. 그는 신앙이 인간의 이성으로 해결 불가능한 역설의 차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신앙의 진리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진리가 아닌 신 앞에 선 단독자인 개별 인간과 인격적인 절대자인 신 사이의 실존적 관계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실존적이며, 주체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다. 아감벤은 이런 식의 논리로서는 이제까지 논의해 온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역사와 영원 간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고 반박한다.

키르케고르의 주장은 참인 동시에 거짓이다. 거짓인 까닭은 그가 내용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의 증언은 (그것을) 말한 사람의 내용이 참되다는 것을 사실의 차원 ev ipso애서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 증언이 참이라면 사실의 층위에서 해방시켜 주는 바로 이 특수한 증언의 형식이 증언의 권위를 취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증언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사변으로 넘어가거나, 신비적 체험으로 모호하게 된다. 우리는 앞에서 시뮬라르크(원본 없이 복제된 이미지)와 시뮬라시옹(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됨) 그리고 실재와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신앙이 모종의 사실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일종의 시뮬라시옹과 다를 바 없다.


마지막 장인 19에서 다시 아감벤은 재판의 현장을 재구성한다. 비록 고고학자들이 당시 로마 총독의 관저를 찾았다고 믿지만, 그 장소에서 예수와 빌라도가 만났다는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저자에 의하면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예수는 멀고(이 세상에 의한 것이 아닌) 또 가까운, 심지어 손에 붙잡힐 정도로 가까운("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누가복음 17장 21절) 곳에 자기 왕국이 존재함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그 주장을 철회한다. 법률적 관점에서 보면 애초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증언은 결국 한 편의 소극(笑劇: 짧고 우스꽝스러운 희극)이 된다.

이 세계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온 그는 자신의 <제2의 자아 alter ego(인간의 측면)>인 빌라도가 한 번도 내리지 못한, 그리고 결코 내리지 못했을 판결에 굴복해야 했다. 아감벤은 이 재판 과정에서 끊임없이 배척하면서 또한 서로를 불러내는 정의와 구원은 결코 화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판결은 무자비하면서 동시에 불가능한 사건이다. 왜냐하면 판결 속에서 사건은 영영 사라져서 구원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구원은 은혜롭지만 무기력하다. 왜냐하면 구원 속에서 사건은 판결 내릴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감벤이 펼치는 이 논리는 현대 신학자라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가 내린 결론은 우리를 더욱 미궁으로 빠지게 한다. “여기 있지 않은 왕국의 진리에 관해 지금 여기서 증언한다는 것은, 우리가 구원하기를 원하는 바로 그것을 오히려 우리가 심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덧없음 속에 있는 세계는 구원이 아니라 정의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가 정의를 원하는 것은 구원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받을 수 없는 피조물이 영원한 것에 대해 판결을 내린다--이 역설이 결국 빌라도 앞에 선 예수를 돌연 끝내버린 것이다. 여기가 십자가고 여기가 역사다."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은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실현하는 유일한 사건이라고 믿고 있다. 그 근거는 오직 예수만이 참된 신이자 동시에 참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성론이 가진 이 모순으로 말리암아 오히려 지상 왕국의 정의와 신의 왕국의 구원은 항상 대립한다. 예수가 말한 그의 왕국에서는 정의와 사랑이 동시에 실현이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에 나타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최후 심판의 날에는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의 이분법>이 지속된다.


"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누구든지 생명 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2,15)" 예수는 분명히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왔다고 이야기했는데, 왜 그의 제자 요한은 마지막 날의 심판에 모두가 다 구원을 받는다고 예언하지 않는가? 사도 바울 역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라고 희망을 주는 듯하면서도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데후 1:9)라고 겁을 주는가?

정말 창조주라면 자기가 형상으로 지은 인간을 (창세기의 이야기에 따르면 타락의 원인은 인간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반역 천사인 사단에게 속은 것이기에 자력 구원이 불가능함) 누구나 조건 없이 다 구원을 받는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구교나 신교는 '오직 예수만을 믿으면 의롭게 된다'라고 말하면서도, 왜 그 이후의 구원의 과정을 그렇게 힘들게 만들어 놓았는가?


더구나 신흥종교들이 가장 많이 써먹는 레퍼토리 역시 최후 심판론이다. 이 글을 읽는 젊은이들은 정말 냉정하게 생각해 보기 바란다. 90억에 가까운 현인류 그리고 그전에 살았던 예수 탄생 전후의 모든 비기독교인들이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면, 사고가 진보된 현대인들은 확률적으로 이런 신앙은 포기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개인적으로 기독교의 구원론에 회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이제 저자의 종결적 해석만 남았다. 이 책의 [주해] 부분에서 아감벤을 다시 만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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