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유령들 해석 1

혁명과 해체: 논의의 시작과 배경

by 박종규

이번 에세이의 주제는 <유대인이면서 동시에 가장 이단적인 유대인>인 공산주의자 마르크스와 해체주의자 데리다와 나아가서 유대교의 최고 이단인 예수를 비교하기 위함이고, 더 나아가서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란 저서(진태원 역/ 그린비, 2017]를 통하여, <이념과 현실의 긴장>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알아보기 위함이다. 우선 데리다가 왜 이런 제목을 택했는지를 알아보자.


1993년 4월 미국의 University of California, Riverside (UCR)에서 개최된 국제 학술 콜로키움에서 데리다는 <Spectres of Marx: The State of the Debt, the Work of Mourning, and the New International, 마르크스의 유령들: 부채의 국면, 애도의 노동, 그리고 새로운 인터내셔널>이란 주제로 강연하였다. 그리고 이 강연 원고가 책으로 확장기술되어 1993년 말 프랑스어 초판, 1994년 영어판으로 발간되었다.

이 콜로키움이 개최된 당시의 역사적이며 지성사적 배경은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1991년 소련 해체와 더불어 미국의 역사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저서인 [역사의 종언 (1989)]이란 담론의 확산과 냉전 종식 이후 특별히 자본주의의 심장인 미국 학계와 언론에서 <마르크스는 끝났다, 자본주의는 최종적으로 승리했다>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시기였다.


데리다는 기조 강연자로 나와서 마르크스를 하나의 폐기된 이데올로기로만 취급하는 신자유주의적 태도를 비판한다. 그는 강연과 그 이후 책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죽었지만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유령(spectre)으로서 지금도 세계를 사로잡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해체주의자로 불리어지는 데리다는 마르크스를 가장 먼저 사망선고한 장소에서, 그 사망선고 자체를 해체(deconstruct)한 강연이 바로 [마르크스의 유령들]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이 강연에서 처음 본격화된 핵심 개념들은 유령성(spectrality / hantologie), 존재도 비존재도 아닌 것의 애도 작업(work of mourning)으로서 마르크스를 정리하려는 시도 자체가 실패하였으며, 부채(debt)란 개념을 택한 이유는 자본주의 체제가 가지고 있는 경제적 부채와 더불어 윤리적/역사적 부채를 지적하기 위함이다. 마지막 개념인 새로운 인터내셔널(New International)에서 그는 과거 국제공산당(인터내셔널) 대신 정당과 국가 없는 연대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데리다나 주로 유럽의 현대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국가 없는 연대>란 마치 <국경 없는 의사>와 비슷하다. 그러나 국경 없는 의사(Médecins Sans Frontières, MSF)와 국가 없는 연대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선 국경 없는 의사(MSF)는 일종의 NGO (제도화된 조직)이며, 국가 주권을 넘나들지만 비정치적 인도주의를 선언하고 후원/기부/법인 구조이자 동시에 공식 대표/대변인이 존재하며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국제적 연대기구이다.

이에 비해 현대철학자들이 제시하는 국가 없는 연대는 비제도적/비공식 네트워크이기에 국경 개념 자체를 해체하고 정치 이전과 이후의 윤리를 강조하고, 비물질적 약속과 책임을 주장하지만 어떤 대표도 없는 연대로서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이런 애매하고도 모호한 개념들을 가진 연대를 주장하는가?


우선 데리다를 비롯한 현대의 대표적 철학자들의 주장을 살펴보자. 자크 데리다의 새로운 인터내셔널(정당·국가 이전의 연대)은 정당도 국가도 시민권도 갖지 않는다. 그는 이 연대가 조직이나 강령이 아니라 공통의 상처, 부채, 책임에 대한 감응이며, 법과 주권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발생하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약속의 네트워크이며 아직 도래하지 않은 정의(justice to come)에 의해 묶이며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는 이미 빚지고 있으며, 그 빚이 우리를 연결한다는 것을 자각하게 함이다.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던 조르조 아감벤 역시 어떤-하나(Whatever Singularity)의 공동체(국가 없는 공동존재)를 제안한다. 이 공동체 역시 형식 없는 공동체, 탈정체성적 연대이다. 아감벤도 국가와 정당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거부한다. 즉 시민, 국민, 계급, 신분을 모두 배제한 공동체이며 이는 그 정체성은 함께 있음 그 자체에서 성립한다. 그에게 정치란 무엇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노출된 채 함께 존재하는 방식이며, 다가올 공동체는 대표도 강령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도 다중(Multitude)이란 주권 없는 생산적 연대를 제시한다. 그들은 제국(Empire) 그 자체를 비판하고 수평적 협력 네트워크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왜냐하면 현대 권력은 더 이상 국민국가가 아니라 초국적 자본/정보 네트워크이기에 이에 맞서는 주체도, 중앙도 없는 다중이며, 어떤 정당이 아니라 협력, 공유, 공동생산이 정치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연대는 투표 이전, 제도 이전에서 이미 작동하며 그렇기에 오픈소스, 사회운동, 디지털 커먼즈가 일상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장-뤽 낭시의 비작동 공동체(Inoperative Community 완성되지 않은 연대) 역시 공유된 결핍으로도 불린다. 모든 공동체는 목적이나 기능을 가지는 순간 폭력적이 된다. 진정한 연대는 함께 완성되지 않음을 견디는 것이며, 공동체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깨진 채로 공유된다.


미국의 철학자 중에서는 주디스 버틀러가 이들과 가장 유사하고 설득력도 있는 사람이다. 그는 개념취약성(vulnerability), 애도 가능한 생명(grievable life)이란 말로 표현된 비주권적 연대를 제안한다. 국가는 어떤 생명은 애도 가능하게, 어떤 생명은 애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연대는 정체성이나 시민권이 아니라 노출된 몸들의 상호 의존성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버틀러는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노출되어 있으며, 이 노출 자체가 정치적 연대의 토대다.”라고 말한다.

미국판 ‘새로운 인터내셔널’에 가장 근접한 철학자는 상대적 실용론자인 리처드 로티이다. 그러나 그는 유럽 좌파들과 달리 자유주의적 연대 공감(sentiment)과 비형이상학적 정치를 주장한다. 그는 연대가 보편 진리에서 오지 않고 고통에 대한 상상력에서 발생한다고 본다. 그는 제도보다 이야기나 문학적 공감이 연대를 만든다고 보는 것이다. 독서모임이나 문학모임과 같은 느슨한 연대가 과연 자신들을 변화시킬 수는 있어도,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을까?


철학은 시대나 현실의 층위나 구조들을 총체적으로 분석하는데 가장 탁월한 학문이다. 한편 철학이 사유하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윤리와 책임은 과학에 비해 추상적이고 종교에 비해 구속력이 떨어진다. 포스트모던적 사색가 리처드 로티는 [철학은 시가 될 수 있을까]에서 마치 장프랑수아 리오타르가 했던 것처럼 <현상과 실재의 구분 없애기>란 장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하버마스와 마르쿠제가 벌였던 <혁명이냐, 개혁이냐>에서 드러난 긴장을 재공유한다.

결론적으로 로티는 연대를 ‘작동하게’ 만들고, 리오타르는 연대가 ‘폭력이 되지 않게’ 만든다. 로티는 번역과 제도화를 제안하나, 리오타르는 감시와 거부권을 강조한다. 두 가지 요소의 긴장이 사라질 때, 연대는 선전이 되거나 윤리는 침묵이 된다. 첫 장에서 정보가 너무 과잉되었다. 꾸준히 어려운 글을 읽어주고 지지해 두는 독자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만약 독자 중 누구라도 ‘나는 이 번역의 바깥에 있는가, 안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이미 그는 완전한 외부자는 아니다. 추상을 번역하는 책임은 ‘권한을 가진 자’가 아니라, ‘균열을 견디는 자’에게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