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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급식 신청서(1)

Milk makes the man!


커피와 섞으면 라떼.. 빵과 먹으면 금상첨화.. 시리얼과 먹으면 아침은 순삭...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또 어떤 이들은 먹으면 배가 너무 아파서 화장실부터 가게 만든다는 마성의 음식


우유! 영어로는 MILK!


이 우유로 인해 인생 최대의 위기를 겪었고 꿈을 갖게 되었다


학창 시절 때만 해도 초등학교 때 우유급식 신청서라는 게 있었다.. 진한 회색으로 되어있는 용지에 동그라미를 쳐서 신청을 하고 매일같이 우유당번을 돌아가면서 배급을 하는 센세이션 한 시스템이다

(지금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라테는 그랬다..)


매주 주번이 우유를 갖고 오고 수요일마다 초코우유 or 딸기우유가 나오는 날이었고 그날은 우유가 항상 부족했었고 좀 산다 싶었던 친구들은 제티를 가져와서 우유에 타먹는 식으로 나름 하나의 소소한 재미가 있었다.


이런 한국 학습 시스템에 습득이 되어있던 나는 이로 인생의 두근거림을 어린 나이에 처음 느끼게 되었다.


때는 바야흐로 초등학교 4학년! 저학년에서 이제 고학년으로 올라가는 딱 중간시기!


평소 아버지는 외국 영화의 팬이셨는데 영화를 볼 때마다 외국인들이랑 다른 나라의 언어로 대화를 해보면 참 멋있지 않겠냐?라고 말씀하셨고 그런 거 같다고 대답을 하였다

(그때 당시에는 이게 유학을 보내기 위해 나를 한번 떠보는 식인 줄 몰랐다...)


가벼운 토크를 나눈 뒤 몇 개월 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뉴질랜드"라는 낯선 땅에 도착해 있었고 그게 흔히 말하는 "유학"이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의 실행력은 대단하신 거 같다)


지금이야 시대가 좋아지고 유학이 흔하게 되었지만 내가 살고 자라오던 동네는 시골이었고 그때 당시만 해도 유학은 서울사람들 즉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가는걸로만 생각을 하였는데 덜컥 내가 "뉴질랜드"라는 곳을 유학을 가게 되었다


유학을 다녀왔었다고 하면 사람들은 "너무 좋았겠다! 재밌었어요?" "영어 실력 많이 늘었겠네! 좋은 거 많이보고"라고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의 나는 "GINGER BREADMAN"이라는 이상한 외국 동요 노래 하나도 제대로 못 외우는 꼴통이었다


내가 도착한 곳은 뉴질랜드의 수도인 "Auckland"라는 곳이었다.


하루하루가 막막했고 눈앞이 깜깜했는데 정신 차릴 틈새도 없이 절차는 빠르게 진행이 되었고 나이로 따져 나는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유니폼을 입고 교실에 앉아있었다

 (한국은 초등교육 6/중등 3/고등 3년이지만 뉴질랜드는 초등 6/중2/고3 시스템이었다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잘 안 난다..)


영어 하나 할 줄 모르고 교실에 앉아 외국인 친구들과 수업을 받으면서 그렇게 학교 생활이 시작이 되었다.


내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선생님과 친구들이 말을 걸면 대한민국 사람의 특유의 사회적인 미소를 지어주면서  "Yes!^^ "라고 대답을 해주면 왜인지 다들 좋아해 주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고 점차 이제 학교에 적응이 되어 가는 시점에 담임선생님께서 종이를 들고 학생들 앞에서 이야기를 하셨다.


뭐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기억나는 거라고는 우유급식 신청서 같은 회색 갱지를 들고 이야기를 하시길래 중요한 이야기하나보다 하고 가만히 듣고 있었고 우유급식 신청이면 그냥 손 들어야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말씀이 끝나 신두리 손을 드시면서 뭐라고 말씀하셨고 정말 신기하게도 내 앞줄이 일렬로 다 손을 번쩍 들며 뭐라고 떠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연의 일치라고는 신기할 정도로 내 앞줄이 손을 다 들었다.)


맨 뒷자리에 앉아 듣고 있던 나는 영어는 비록 못할지라도 대한민국 민족의 내재되어 있는 눈치 빠른 DNA가 발동이 되어서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야 하는구나" 하고 손을 번쩍 들었다.

(앞에 친구들이 드니 당연히 나도 들어야 하는 줄 알고 들었다)


그러자 담임 선생님은 물론이거니와 반 친구들이 다들 나를 오올~!!! 이러면서 나를 바라보고 박수를 쳐주었고 담임선생님은 뭐라 말을 하셨는데 기억나는 거라고는 뭐 올린다? list up이라는 단어를 들었다.


시골 출신이었던 나는 흔히 외국사람들은 리액션들이 좋고 뭐만 하면 칭찬하는 문화가 있다고 생각하니 


"아 이나라는 우유급식 신청만 해도 칭찬해 주네 참 좋은 나라구나!" 하고 미소를 지으면서 Thanks!라고 대답을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창피하지만 그때 당시만 해도 thank you 보다 thanks라고 대답을 하면 뭔가 영어도 잘하고 있어 보여서 thanks!라고대답했다)


그렇게 우유급식 신청서를 받고 쉬는 시간에 옆반에 있는 한국인 친구(helper)에게 놀러 갔다

(*참고로 내가 다니던 학교는 영어권이 아닌 외국에서 온 친구들에게 영어를 잘하거나 혹은 뉴질랜드에서 자란 같은 나라 친구를 helper라고 그 나라 출신의 친구 한 명씩 붙여주며 그 친구에게 전반적인 학교문화 또는 영어 도움을 받았었다)


*이하 Helper 친구이름이 David 이였기에 D라고 지칭을 하겠다.


나는 D에게 다가가 "역시 외국이어서 그런지 우유급식 신청만 해도 칭찬을 해주네 좋은 나라다!"라며 이야기를 건넸고 D는????라는 표정으로 내가 보여준 신청서를 쭉 읽어보고 한마디를 하였다.


"야! 니 X 됐어! 이거 우유급식 신청서가 아니라 이거 연극반 신청서야! 니 영어도 못하는데 대사는 어떻게 외우게? 진짜 들어갈 거야?"


D의 말을 듣고 내 인생 가장 긴 3초의 시간이 흘렀다.. 주변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본능적으로 뭔가 아주 크게 잘못되었구나를 느끼고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아... X팔! 클났구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D에게 다시 읽어보라고 하였고 D는 Acting이라는 단어 안 보이냐면서 이거 연극반 신청서라고 다시 한번 나에게 큰일이 났음을 일깨워줬다.


위기의 순간에는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정신없어할 거 같지만 그와 반대로 굉장히 차분해지고 정신이 뚜렷했다. 


나는 D에게 지금부터 내가 한국말로 할 테니 그걸 영어로 번역을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고 


내가 잘못 알아들어서 한국의 이러이러한 시스템이 있어서 나는 그 거인 줄 알고 앞줄 애들이 다 손을 들킬래 나도 해야 하는 줄 알았다 내가 들어가면 나는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꼴이 되니 나를 제외시켜라였다.


D에게 영어로 된 사유서(?)를 받고 급하게  부탁을 하고 담임선생님에게 찾아가 쪽지를 건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담임선생님은 쭉 보시더니 Nope! already finish!라고 짧고 간결하게 말씀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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