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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의미

직접 경험의 즐거움

by 윤병옥

김영하 작가는 그의 저서 ‘여행의 이유’에서 “여행이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다른 깨달음을 얻어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나는 여행에서 어떤 의미를 찾았을까?


일단 여행이란 일상에서 벗어나는 행위이니 크고 작은 의무에서 해방된다. 여행을 갔을 때는 집에서 일어나는 모든 자질구레한 걱정과 의무를 잊어버린다. 물론 돌아왔을 때 밀린 빨래와 청소가 기다리고 있을지언정 여행지에서는 이런 것들을 잊는다. 식사 때마다 먹을 것을 기대하며 나만 멀뚱하게 쳐다보고 있는 가족들로부터도 해방이다. 나도 장기간 남이 주는 밥을 먹을 수가 있다.

의무에서 해방되면 그 순간만을 살 수 있다. 지금 보이는 것을 온전히 즐기며 몰입할 수 있다.


나이가 드니 체력은 좀 달려도 좋은 점이 있다. 젊을 때는 어린 아이들과 함께 가거나 어른들을 모시고 여행을 가게 되니, 시중드느라 여행지의 풍광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기억에 남는 것도 별로 없었다. 그냥 갔다 오는 것이 아닌 나를 변화시키는 진정한 여행은 동등한 관계의 친구와 가거나 혼자 하는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패키지 여행의 경우 같이하는 사람들에게는 친절하게 대하지만 서로 연락처는 물론이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다. 경험상 그룹 여행에서 여행이 끝난 후에까지 연락을 주고받으며 친구가 된 사람은 거의 없다. 자유롭고 좋은 분위기에서 나쁜 측면을 드러내는 사람은 없으니 짧은 기간에 그 사람이 친구가 될만한지를 판단할 수는 없다. 따라서 친구를 만들려고 여행하는 것이 아닌 한, 적당한 선을 두고 익명으로 존재하는 것이 서로 편하다. 가끔씩 틈새를 파고들며 자기 자랑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칼 같이 차단한다. 소중한 시간을 오염시키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곳까지 와서 자랑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 얼마나 자신감이 없길래 저럴까 하는 연민이 생기지만, 내가 먹잇감이 되고 싶지는 않다. 이렇게 내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돌아온다.

미디어에는 온통 나 대신 경험을 해주는 사람들 투성이다.

나 대신 축구도 해주고, 나 대신 연애도 해주고, 나 대신 먹어주고, 나 대신 여행도 가 준다.

사람들은 소파나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서 그들을 본다. 나의 지인 중에는 차고 넘치도록 여행 프로그램이 많은데 구태여 고생하며 멀리 갈 필요가 있는지를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원래 움직이기를 싫어해서 그러지 않아도 인생이 온통 책이나 영화 같은 간접 경험 천지다. 내가 보지도 못하고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한 묘사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악기를 한번 배워보면 아무리 세계 제일의 연주자가 멋지게 연주하는 것을 보아도 내가 서툴게 한 연주의 떨림과 감동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여행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직접 본 풍경 속에는 카메라에 담을 수 없는 짭짤한 소금기와 바람과 햇빛이 들어있다. 내가 여행지에서 먹은 음식들은 미디어 속의 미사여구로 표현된 허황된 맛이 아니라 진짜 내가 감각한 맛을 가진 실체이다.

물론 직접 경험한 후에 남이 출연한 미디어를 보면 그 감동을 다시 불러올 수도 있고 확장할 수도 있지만 간접 경험만으로는 절대 직접 경험을 대치할 수 없다.

그래서 방구석을 탈출해서 진짜 세상을 보는 일은 중요하다.


여행에서는 내가 늘 있었던 곳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자연이나 건축이나 문화가 나를 활기 있게 만든다.

다양한 외모와 습관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수많은 지구인들 중 하나라는 것도 느낀다.

우리나라가 익숙하고 좋지만, 인구 밀도가 높고 산과 고층 건물이 많아서 하늘이 잘 보이지 않는다. 여행을 가보면 어떤 곳들은 높은 건물도 없고 하늘이 넓어서 감탄할 때가 많다. 그저 맑은 공기와 넓은 하늘이 있는 세상도 있다는 것에 놀란다. 몇백 년도 넘는 멋진 건물이 도시를 가득 채운 곳을 볼 때는 부러웠다. 만년설과 넓은 빙하호수를 보는 것도 즐거웠다. 그런 곳을 보았을 때 특정 예술가의 분위기가 그 사람이 살던 자연에서 나왔다는 것이 느껴졌다.

기후가 다른 곳이나 소득이 낮은 나라를 여행해도, 어떤 곳이건 사람들은 적응하며 각자의 문화를 만들어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이 보여서 나에게 자극을 주었다.

지구는 넓고 나의 시간과 경제력은 유한하니 모든 곳을 다 가보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없다. 앞으로 얼마나 여행을 갈지 모르겠지만, 꼭 가보고 싶은 여행이 하나 있기는 하다.

서울에서는 먼지도 많고 야간에도 조명이 밝아 어릴 때 보던 별이 안 보이는 것이 애석하였었다. 티브이를 보니 몽골 초원이나 사하라 사막같이 주위에 풀과 모래만 있는 지역에서는 밤에 별이 쏟아진다고 한다. 사진이나 모니터 속의 별이 아니라 진짜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너무 늙기 전에 꼭 보고 싶다. 그러면 칸트처럼 내 마음속의 도덕률도 따라서 반짝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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