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복 바지의 큰 장점 중 하나라면 양다리에 옆주머니가 있어 훈련 나갈 때 건빵 같은 부식이나 작은 물건들을 넣고 다닐 수 있는 건데, 나의 경우에 있어서는 영외훈련을 나가서 종이 위에 글을 쓸 수 없을 때마다 대신 기록할 PX에서 파는 1000원짜리 수첩과 제트스트림 0.5 볼펜을 스프링에 끼워둔 채 가지고 다니곤 했다.
그땐 그게 뭐라고 그렇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쓰려고 했던 걸까. 장비를 타고 나가는 영외훈련이라는, 군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의 순간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싶었는데, 훈련 도중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평평한 곳을 찾아 글을 쓰는 걸 보면서 간부나 선임이나 특이한 놈이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내가 무슨 내용을 쓰는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바라봐주기만 했던 게 지금 생각하면 고맙기만 하다. 만약 그런 게 쉽게 용인되지 않는 엄격한 분위기였다면 짬 낮은 병사가 훈련 중에 그런 걸 하긴 쉽지 않았을 테니까. 게다가 당시 내 글을 재밌게 읽으시고 나와의 대화를 즐거워하신 중대장님의 영향이 컸다.
평평한 곳이면 어디든 좋았다. 잠자기 전 텐트에서 돌격낭 안에 넣어둔 책을 판으로 대거나, 식사시간을 틈타 빠르게 간이 테이블 위에서 쓰기도 했지만 가장 많은 글을 쓰게 된 곳은 전차 안에서였다.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가는 비좁은 포수석 안에서는 조준손잡이 옆에 있는 작은 가대에다가 수첩을 펴고 그 좁은 곳에 얼굴을 비집어 넣은 채 글을 쓰고, 탄약수를 할 때는 서있는 채로 상판에다가 수첩을 놓고 썼다. 전차 위가 먼지가 많이 날려서 시간이 좀 날리면 종이에 모래가 붙어 금방 표면이 거칠어지고, 겨울에는 장갑을 벗은 채 펜을 쥔 손이 인제의 차가운 공기에 얼어붙어 어떻게든 반대쪽 손으로 핫팩을 갖다 댄 채 얼었다가 녹기를 반복하고, 여름에는 습기에 반쯤 젖은 종이 위에 어떻게든 잉크를 묻혔다. 특히 KCTC 때는 실제 철야 작전 중에 모든 불빛을 끄고 무전대기를 하며 밤을 지새우는 와중에 어떻게든 반사된 달빛에 암순응으로 겨우 보며 글을 쓴 건 지금 보며 열정을 넘어 광기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그때 적어둔 수첩이 지금은 다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수첩에 써둔 내용은 부대에 복귀하고 나서 전부 다 종이 위에다가 옮겨 적기는 했는데,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설마 버린 걸까. 아니면 집에 두고 까먹은 걸까. 예전에 우리 소대 하사 간부님(지금은 중사로 진급하셨단다)께서 나에게 겁을 주려고 했던 건지 그런 기록물을 남겨놨다가 나중에 검열 와서 걸리면 징계 먹는다고 해 당시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혹시나 해 어떻게 처리를 했던 것 같은데, 숨겼는지 버렸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당시 투박했지만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글쓰기를 대하는 태도를 가장 잘 나타내는 나름 소중한 물건인데, 겨울에 집에 가면 한 번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