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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쓰는 복학생 Dec 24. 2023

바보 같은 짓들의 연속


아직 오후 3시밖에 안 됐지만, 오늘 하루종일 계속해온 바보 같은 행동들이 너무 많아 기록해야만 했다. 돌아보면 어떻게 결과가 이렇게 잘 풀린건지 의문이 들 정도로 내내 이상한 행동을 반복한 하루다.


어제 자기 전에 침대에 누운 채 아이패드로 스타크래프트 영상을 봤는데, 언제 잠든지도 몰랐던 나를 깨운 건 2층 침대에서 무언가 우당탕하고 떨어지는 소리였다. 소리에 놀라 막 잠에서 깼을 때는핸드폰이 떨어진줄 알고(지난번에 떨어뜨렸을 때 액정 필름을 벗겨놨던지라 이번에는 큰일이었다) 헐레벌떡 침대에서 내려왔는데, 알고보니 핸드폰은 전날 밤에 충전기에 꽂아놓은 채 책상 위에 놨던지라 멀쩡했고, 책상 뒤 틈새로 떨어진 아이패드도 다행히 케이스 모서리가 조금 패인 걸 제외하면 멀쩡해 보였다. 사실 처음부터 책상 위 핸드폰을 보자마자 약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핸드폰과 달리 아이패드는 애플케어를 들어놓기도 했고, 당장 학기 중이 아닌지라 별로 쓸 일이 없었다.


그렇게 아침 일찍 일어나 전날 마저 다 못 본 스타 영상을 보면서 빈둥거리다(요즘 테란 대 저그, 프로토스 대 저그 영상 위주로 자주 보는데, 스타를 직접 하고 싶어도 미국에 있는지라 못해 아쉽다), 10시쯤 돼서 방학이라고 언제까지나 늘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앞으로 들을 강의 계획을 짜고, 대충 할 일 하면서 공부나 하려고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이게 웬 걸, 방학동안 학교 도서관만 닫을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MLK 센터도 문을 닫았었다. 학교에서 마땅히 갈 곳이 없는 상황에서 카페를 가자니 괜히 나와서 돈 쓰기는 싫고는 해 그냥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학교에 가까우면 좋은 점이 많으면서도, 굳이 단점을 꼽자면 뭔가 학교에 와놓고 상황이 애매할 때 별 고민 없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는건데, 집에 있으면 유독 쉽게 늘어지고는 하는 나에게 집이 학교에 가까운 건 통학하기 편하다는 장점과 함께 이런저런 문제를 야기하고는 한다.


집으로 돌아온 후 가방에 있던 책과 노트북을 다시 꺼내고, 이제야 계획한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 강의 영상을 켰다. 그러나 역시 오늘은 뭔가 안 풀리는 날인건지 들으면서 필기를 하려 하니 애플 펜슬이 작동을 안 했다. 처음엔 액정 문제인가 했지만 별 기스 같은 것도 없이 깔끔하고, 블루투스랑 충전 연결도 멀쩡하게 잘 되는데 도대체 왜 안 써지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 펜을 유심히 보니 흔들 때 안에서 조각 같은 게 느껴졌다. 안에서 깨졌구나. 아마 아침에 떨어뜨릴 때 펜이 책상 모서리 같은 곳에 부딪쳐서 그렇게 됐나보네.


갑작스러운 변수에 공부 할 생각은 싹 사라졌고(무슨 세팅 강박증도 아니고 내가 정해놓은 상황에서 뭔가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바로 의지를 잃어버린다), 애플 펜슬 수리를 받으러 다시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버클리 마리나 쪽은 3달 전에 아이패드 사러 갈 때 이후로 좀처럼 갈 일이 없었는데, 이런 이유로 다시 가네. 원래 하루 계획이 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어제 시킨 식재료 배송 받으러 집으로 돌아가는 거였는데, 하루가 생각했던 방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채로 흘러갔다.


집에서 나와 학교 앞에 있는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갔는데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교통카드가 들어 있는 지갑을 챙겨 나오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정말 사소한 행동의 차이로 인해 하루종일 틀어지는 일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에 슬슬 짜증이 밀려와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집에 있을까 생각이 들던 찰나, 집 근처에 거의 다다라 현관문을 열려고 가슴 주머니에 손을 가져다대니 그 순간 손 끝으로 느껴지는 두툼한 감촉은 오늘 하루종일 반복되는 바보같은 행동들의 절정에 달했음을 깨닫게 했다.


오늘은 이런 날이구나 반쯤 체감한 채,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버스를 타고 갈 때도 잠깐 멍 때린 사이 내려야할 곳을 놓쳐 애플 스토어가 있는 상점가에서 멀리 떨어진 세자르 차베즈 공원 근처에서 내렸다. 어차피 500미터도 안돼서 걸어서 왔던 길로 돌아갈 수 있겠거니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인도가 없어 갓길을 위험하게 따라가야했고, 그마저도 옆쪽으로 쭉 돌아가야해서 꼬박 20분을 더 허비했다.


그렇게 도착한 애플스토어, 크리스마스 연휴가 다가와서 그런지 생각했던 것보다 사람들이 붐빈 탓에 대기 시간이 꽤나 길었다. 그사이 이번에 새로 출시한 아이폰과 맥북을 구경했는데, 특히 요즘 노트북 팬 소음이 유독 심해져서 다른 걸 하나 살까 고민중이라 프로를 유심히 봤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사양은 18GB램에 512GB SSD의 14인치 맥북프로인데, 가격이 세금 제외 $1,999이어서 당장부터 최대한 돈을 모아놔야겠네. 다음 학기부터는 진짜 외식 많이 줄여야겠다.


구경 좀 하다보니 금방 내 차례가 왔고, 대충 이런 문제가 있다 설명해주니 직원이 애플 펜슬 시리얼 넘버랑(펜 안쪽에다가 돋보기 같은 걸 가져다대서 확인하는데, 이런게 있구나 신기하다는 듯이 구경했다) 고객 정보만 좀 확인하더니 곧바로 새 제품을 가져다줬다. 분명 인터넷에서는 애플 케어 적용받아서 $29를 내야한다고 알고 있어서 돈을 안 내도 되냐고 직원에게 물어보니, 보증이 아직 안 끝나서 무료로 교환해준다고 했다. 아니 보증이라기에는 내가 실수로 침대에서 떨어뜨려서 망가진건데, 수리가 힘들어서 그런건지는 몰라도 아예 새걸로 바꿔주는 방식은 처음인지라 생각보다 좋은 쪽으로 흘러가는 상황이 마냥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오늘 내내 해온 바보같은 짓들에 비해 애플 스토어까지 갔다오는 시간 정도를 제외하면 손해본 게 없는 하루였다. 게다가 애플 스토어에 갔다오느라 홀푸드에서 식용유 사기로 한 계획도 틀어졌는데, 버스에 있을 때 요리 레시피를 찾아보다가 파스타에 들어갈 양파랑 다른 채소들을 올리브유로 볶는다는 사실을 알게 돼 굳이 당장 사러갈 필요가 없어졌다. 바보에게도 행운은 찾아오는 걸까. 아니면 나의 행동들에 대한 결과가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거지만 나의 이상한 기대와 맞물린 탓에 괜히 운이 좋았다고 느끼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는 기묘한 하루다.


점심으로 뭘 해먹을지 고민하면서 집 현관 앞에 도착하자, 내일 영업을 종료하는 중국 음식점이 눈에 들어와 오늘 아낀(사실 아꼈다고 생각하는) 돈도 있는 김에 음식을 포장해갔다. 아직 하루의 반도 안 지났는데 벌써부터 엄청 피곤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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