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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osh 직장인 Dec 16. 2023

소크라테스 플라톤으로 알아보는  "어떻게 살 것인가"

마지막 관심과 애정 / 정직하게 살자.

 

“아테네인 여러분, 나를 고발한 사람들로 인해 여러분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난 알지 못합니다.”1)   

  

 <소크라테스의 변명>(이하 <변명>)의 첫 문장이다. 본 책의 역자는 <변명>의 플라톤적 탐색의 출발점을 이 문장으로 보았다. 이 문장에서 내가 가장 유심히 지켜볼 말은 “난 알지 못합니다.”(나는 모른다) 부분이다.

 소크라테스의 이전 세대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뭐든지 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앎을 모르는 사람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brotoi)’라고 표현하며, 자신을 신적 경지에 올라 있는 사람 즉, 우월한 사람으로 생각했다.2)

 반대로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참으로 독특하다. 그는 “난 알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실제로 알지 못하니까 바로 그렇게 알지 못한다고 생각도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적어도 이 사람보다는 바로 이 점에서 조금은 더 지혜로운 것 같다.”(<변명>. p. 44)라는 말을 중심으로 한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언행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경지’, 즉 무지를 아는 경지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철학적 근원은 고대 그리스의 전통적인 믿음인 “인간의 무지와 지혜의 신적인 기원에 대한 믿음”3)에서 왔다. 그는 이러한 믿음에서 타인과 대화하며 논증을 철저히 검토하는 삶을 살았다. 왜냐하면, 당대 시인들의 언행과 달리 소크라테스는 신적인 계시들을 “수수께끼로 받아들이면서 그 뜻을 질문하고 이성의 힘을 빌어 그것을 풀이하려고”4)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았을 때는 “미결정의 것으로 두어도 조급해하지 않는 태도”(<변명>. p. 174)를 보이는 것이 소크라테스적 지성의 특징이다.

 아무튼, 우리는 무지의 자각을 통해서 알려고 한다. 그리고 알아야지 행할 수 있거나 하게 된다. 이는 인간의 기능과 구실을 제대로 수행하는 상태로 연결된다. 즉 인간의 arete5)(인간의 훌륭한 상태)가 되어 행복할 수 있다.6) 그런데 이러한 상태가 되려면, 무지의 자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소크라테스의 말을 서론에서 이야기한 까닭은 지적 겸손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퇴임하는 사람의 글을 봤었는데, 사람이 자리에 따라서 이렇게 오만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퇴임 글을 빌미로 할 말을 다 하고 갔다.

 본인 스스로를 “역사상 다시 없을 불세출의 기자”라고 소개하며, 애먼 소리를 들을 때마다, 애먼 소리 한 사람을 한 대 쥐어박고 싶다며 “제 사정을 압니까? 아니면 대학언론을 압니까?”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을 스스로 학보사의 ‘GOAT’라고 소개했다.7)

 글은 뒤로 갈수록 많이 이상해진다. 교수가 계속 모른다고 해서 바지사장이냐고 물었는데, 교수가 화를 내 본인이 황당했다는 논리 구조, 마지막에는 ‘내가 개고생 한 것처럼, 너네들도 이만큼은 할 줄 알아야 해!’라는 말은 학보사의 현 수준을 나타내기 충분했다.

 이뿐만 아니라 ―지금은 기록조차 없어졌지만― 18년도에는 한 기자가 트위터식 페미니즘 논리로 쓴 칼럼을 검토 없이 발행하고, 은근 슬쩍 한 쪽으로 기울어진 정치적인 기사들을 내내 찍어내고 있다.* 자칭 학보사의 GOAT는 ‘어차피 보지도 않는 글’이라고 소개했지만, 되려 이러한 의식 상태가 다시 한번 학보사의 수준을 말해줬다.

 대학에 있으면서 항상 느끼지만, 학보사 사람들의 글을 보면 기원전 5~4세기경 소피스트들이 떠오른다. 소피스트들은 설득을 목적으로 한 논변술을 사용했으며, 진리 또는 정의를 상대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들이 작성한 ‘트위터식 페미니즘 기사’, ‘자연스럽게 정치적으로 한쪽으로 기울어진 기사’, 마지막으로 ‘방종한 독지론에 불과한 칼럼 글’을 보면 자연스럽게 소피스트들이 떠오른다.

 기원전 5~4세기경에는 소피스트들을 혼내준 소크라테스라도 있고, 지금도 소피스트와 같은 사람들을 지적할 수 있는 사람 많지만, 다만 오늘날의 사람들은 그들과의 논쟁을 거부하고 뒤로 돌아서 ―독서 활동이든 자기 계발이든 취직 활동이든―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절대 토론을 활성화시키거나 다른 대안을 모색하게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악마의 대변자’(devil's advocate)를 자처해 이성의 편파성과 편협성을 불러일으키는, 즉 ‘반대를 통한 균형’을 성취하는 숭고한 언행으로 알고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들은 토론을 촉진시키거나 다른 대안을 모색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이 좁디좁은 대학 내에서, 완장 찬 꼬마같이 자신의 ―그렇게 우월한지도 모르겠지만― 지적 우월만 강조했을 뿐이다.

 공적으로 쓰는 글은 더이상 그들만의 텃밭이 아니다. 본인들이 고지한 대로 학보사는 “모든 활동을 공정하게 보도함으로써 (중략) 학풍정착과 대학문화 창달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두어야 한다. 즉 진실을 말함으로써 학풍과 대학문화 창달에 기여를 목적으로 두어야 한다. ―여담이지만, “신문사의 알파요 오메가인 글쓰기 능력입니다.”라며 어쭙잖게 교회 용어를 인용했는데, 원래 알파이자 오메가는 진실―진리―추구에 있고, 학보사가 추구해야 할 것도 이와 같다. 기본도 모르면서 되지도 않게 ‘글쓰기 실력’을 늘려봤자 변론에 불과하다. 학보사를 대표하는 사람이 인용하나 제대로 못 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안타깝다. ―“순수하지 않은 것에 순수한 것이 포착되는 법은 없다.”(<파이돈>. p. 42) 본인들이 직접 쓴 글로 이를 방증하고 있어 아쉬울 따름이다.     


 무지의 지(知)는 지식의 시발점이고, 겸손은 미덕이자, 인간의 arete 중 하나이며, 현명함은 최고의 덕이다.8) 위의 사람들과 달리 우리는 이를 추구해야 한다. 졸업하기 전 대학 생활을 돌이켜보면, ―타인에게 무시당하든 받지 않든―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니 그것에 대해서 당신이 알고 있다면 설명해 주세요.’의 태도로 타자와 대화하는 것이 지(知)의 시작이자 겸손함이며 현명함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태도는 별것 아닌 나를 더 겸손하게 만들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대화할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나라고 해서 겸손하지 못한/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나도 그들처럼 독선과 위선을 가졌고, 지금까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나는 본 글에서만큼은 독선과 위선을 그만둘 것이다.9) 사악은 “죽음보다 더 빨리 달려”온다(<변명>. p. 104). 그리고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이기에  그만두려 한다.

 소크라테스가 <향연>에서 말했듯이, ‘좋은 것’(방편)만을 추구하고 찾지 말고, ‘좋음’(영원한 것)을 추구하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현대의 우리는 부, 명예, 지적인 자랑과 같은 가시적인 것을 추구한다. 그것들은 언젠가 다 사라질 것이다.10) 그러니 우리를 배신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을 것을 추구해야 한다.

 ―비록 우리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직업으로서 ‘철학자’는 될 수 없겠지만,―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처럼 가시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그 너머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고 나아가야 한다.11) 소크라테스는 이를 ‘사색과 탐구’ 그리고 ‘타인과의 담론 쌓아 나가기’와 같은 작업으로 생각했다. 앞서 말한 영원한 것을 추구함으로써 우리는 ‘인간의 arete’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나는 모른다.’라는 생각, 즉 무지의 지에서 시작한다.

 이렇듯, 플라톤의 작품은 우리에게 인간의 arete를 향해 달려 나갈 수 있는, 즉 행복한 삶의 실마리를 거짓과 속임수 없이 제공된다. 수천 년이 지난 기원전 현자의 말은 아직도 통용되고 읽히고 있다. 인생의 격언이 필요하다면, 평생 읽을 책이 필요하다면, 플라톤의 저서들을 꼭 읽어보길 바란다.




작가의 말


'그것/그것들'에 대한 마지막 관심이자 애정의 글.

 이제 그것/그것들은 무언가를 알지 못한 채로 그것/그것들의 길을 가야하니, 그 길로 가지 않는 내가 더 이상 관심 쓸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각기 다르게, 영원히 서로 닿을 수 없는, 차이 또한 말할 수 없는 삶을 살겠지.


*혹시라도 이 말을 이해하고 싶다면, <파이돈> 88c~91과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10권을 참조하길 바란다.



인용  및 알림.


* : 페미니즘이 나쁜 게 아니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조잡한 글자들을 칼럼이라고 쓴 것과 검토 없이 발행해준 것이 참으로 악덕하다. 그리고 국립대에서 정치적인 기사를 쓰는 것도 문제지만, 조교와 같은 관계자들이 그저 보고만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무능하다.

1) 플라톤. (2023 판본). <소크라테스의 변명>(강철웅, 역). 아카넷. pp. 25~26. 본 글에서 사용되는 플라톤 작품은 전부 ‘아카넷’ 판본이며, 이후부터는 제목과 쪽수만 표기하겠음.

2) <변명>에서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흔히 말하는 소피스트들과 자신을 추론해 보았을 때, ‘우리 서로 아름답고 훌륭한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데, 소피스트들은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고 생각하고, 반면에 나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기에 내가 조금은 더 지혜로운 것 같다.’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 크세노파네스, 엠페도클레스는 흔히 말하는 ‘유체 이탈 화법’을 사용하면서 강의를 했고, 강의의 대가로 돈을 받았다.

3) 조대호. (2003). <소크라테스 윤리의 그리스적 전통에 대한 연구: 소크라테스 철학 안에서 이성과 신적인 계시의 관계>. 철학논총, 3(33), p. 317.

4) 조대호. (2003). 앞의 책. p. 317.

5) “인간의 arete”는 “인간의 훌륭한 상태” 혹은 “인간다움”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문맥상 “인간의 훌륭한 상태”라고 번역하겠다.(‘arete’ 번역에 관한 근거는 W.K.C 거스리. (2000). <희랍 철학 입문>(박종현, 역). 서광사. p. 21 각주 10번 참조하기.)

6) <항연>에서 소크라테스는 ‘좋은 것(부, 명예, 사랑 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좋음’을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좋음’을 추구하는 것은 사색과 탐구를 통해 깨달은 담론을 타인과 이야기하고 그렇게 협력해 나아가야 함.’을 말한다. ‘인간의 arete’의 추구 또한 ‘좋음’ 자체를 추구하는 것과 연결성을 지니는 것 같다.

7) 여기서 ‘불세출의 기자’, ‘GOAT’라며 자신의 가치를 본인의 입으로 이야기하는데, ‘가치’는 타동사적인 용어이다. “특수한 상황에 특수한 사람들이 특별한 기준과 일정한 목적에 따라 평가한 것이면”(Terry Eagleton. (1996). <Literary Theory An Introduction SECOND EDITION>. The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p. 10) 모든 것에 의미가 있다. 본인이 생각했을 때도 자신이 학보사의 GOAT인 이유는 위와 같은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가치평가는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는”(Terry Eagleton. (1996). 앞의 책 p. 10) 말에 불과한 것처럼, 그의 주장은 ―사실상 의미 없는 글자에 더 가깝지만, 굳이 주장이라 치자면― 방종한 독지론(獨知論)에 불과하다.

8) “참된 소크라테스 학도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의 무지를 깨닫고 있으므로, 참된 소크라테스주의는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의 자세, 즉 쉽게 교만으로 오해된 지적인 겸손을 상징한다. 어떤 적극적인 학설보다도 이것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공헌이다.”(W.K.C 거슬리. (2000). 앞의 책. p. 103), “현명함과 떨어져서 서로 맞바꿔진다면, 그러한 덕은 일종의 그림자 그림일 것이고, 실로 노예에게나 어울리며, 온전한 바도 참된 바도 없는 것일 걸세.”(<파이돈>. p. 47)

9) 소크라테스가 “아무도 자진해서 그릇된 짓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처럼 이제 깨달았기에, 나는 그릇된 짓을 하지 않는다. 반대로 깨닫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릇된 행위/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유일한 악”인 ‘무지’하기에 삶의 가치를 스스로가 깎아내리고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말을 덧붙이면, “선택에 있어서의 무지는 무의적인 행위의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사악의 원인”이다(아리스토텔레스. (2008). <니코마코스 윤리학>(최명관, 역). 창. p. 98). 그들은 ‘안 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썼기에 사악의 길로 빠졌다고 볼 수 있다.

10) <향연>에서 말한 ‘에로스’의 예시를 들자면, 그는 포로스(방편의 신)와 페니아(가난의 신) 사이에서 태어났다. 에로스는 방편을 좇지만, 그 방편이 다했을 때, 그에게는 결핍만 남아있게 된다.

11) “각각의 것에 가능한 한 사고 자체로만 접근하는 사람, 사고함에 어떤 시각도 개입시키지 않고 다른 어떤 감각도 추론과 함께 끌어들이지 않은 채로, 섞이지 않은 사고 그 자체만을 사용해서, 있는 것들 각각을 그 자체로 섞이지 않은 채로 추적하려 하는 사람”(<파이돈>. p. 40) 물론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경지가 죽어서 가능하다고 말했지만, 살아 있는 우리에게 하등 쓸모없는 격언이 아니다. 되려 우리에게 논증을 진행하는 방식이나 철학적인 접근법에서 도움이 될 격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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