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의 <벌레이야기>를 보면, 알암이 엄마가 살인마에게 불쌍하다면서 그를 용서해 주려는 생각에 교도소로 가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이 알암이 엄마를 죽음으로 내 몰았다.
신도 아닌 한낱 인간이 타인에게 기회를 준다는 것/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참으로 오만한 생각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인간은 잘못한 타인을 용서 or 무시(혹은 배제)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나는 그릇이 작은 사람이라서 용서는 못하겠다. 그래서 어찌하나 싶었는데, 이에 대한 힌트이자 답을 책에서 찾았다.
고대 그리스 회의주의는 "지식을 획득하지 못하는 한, 그 무엇도 확언하지 않는 것이 회의주의자의 목표이다."1)
고대 회의주의자들은 인상들 간의 불일치를 직면하게 될 때, 깨달음을 얻는다. 보통 같으면 인상들 중에서 참 거짓을 가려서 혼란을 해소하지만, "이에 관한 탐구는 고대 회의주의자를 판단 유보로 이끌며, 판단 유보는 마음의 평정을 가져온다."(p. 14) 그리고 고대 회의주의자는 자신이 의심하는 문제-즉 해결하지 못한 문제에 대해서는- 답변을 확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의심을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혼란에서 판단 유보로 나아감으로써 자신의 심리적 상태를 개선한다."(p. 15) -우리들이 흔히 오해하는 부분이 바로 "회의주의자는 사색하기 거부한다."라는 식의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회의주의자들은 "모든 물음에 대하여 진리를 모색하는 데 헌신한다. 이와 같은 모색이 반복적으로, 예측을 벗어나지 않고 판단 유보로 이어질지라도 말이다."(p. 16)
이제부터는 나도 오직 인간관계에 있어서 만큼은, 내가 알려는 것에 대한 한계점(즉 알지 못하는 점)까지 도달할 경우 '판단 유보'를 하고 다른 일을 하려고 한다. 이러한 모습에 혹자들은 "다 알지 않으려는 비겁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지만, 그 사람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해 봤고 더 이상 무언가를 더 알지 못하는데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신이 아니다. 그러니 한낱 인간인 나는 '그 관계'를 유보하고 내 일 하려고 한다. 어차피 내가 손쓸 수 없는 것을 계속 생각해 봤자 스트레스받을 뿐이다. 최선을 다한 뒤에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할 수 없는 상태가 온다면, 차라니 나의 심리적 상태를 개선하는 것이 더 유익하고 바람직하다.
출처
카차 포그트. (2018). <고대 회의주의 : 스탠퍼드 철학백과의 항목들9>(김은정 외 5명).전기가오리. p. 6. 이하 본 책을 이용할 때는 페이지 표기만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