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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미 Aug 14. 2022

[에세이] 감정총량의 법칙

사랑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랑을 하고 있어


감정 총량의 법칙이 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과 달리 새로운 감정이 채워지지 않으면 절대 지워지지 않는 감정. 시간을 보내도 괜찮아지지 않는 그런 감정이 있다. 어릴 적 장롱에 붙여놓은 껌 스티커처럼 아무리 지워도 까만 흔적을 남겨 결국 장롱 통째로 버릴 때까지 지저분하게 남아버리는 그런 감정이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 라기보다 내 안에 자리 잡고 놓아주지 못하는 그런 감정이 있다. 어떤 책을 읽어도, 영화를 봐도, 드라마를 봐도 마냥 새롭게 떠오르는 케케묵은 오래된 옷의 냄새가 나는 그런 감정이 있다. 노래를 들으면 다시 돋아나고 아무리 뭉개도 떨쳐지지가 않는. 시간이 몸처럼 자라나 내 일부가 되어 도려내지 않으면 지워낼 수 없는 그런 사람이 있다. 아주 오래된 시계처럼 삐걱거리면서도 초침의 소리를 내며 가끔 존재감을 일깨우는 그런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사랑에 실패하면 모두들 다신 연애 따윈 안 하겠다고 다짐한다. 친구들은 연애를 하고 있든, 아니든 결혼은 하지 않을 거라 말한다. 어떤 친구들은 더 이상 사랑을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없다. 사랑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사랑해서 더는 사랑 할 수 없는 것이다.


친구들에게 항상 하는 이야기가 있다. 나는 빨리 결혼할 거라고. 빨리 결혼해서 보란 듯이 행복해질 거라고. 만나고 보니 나 역시 그냥 그런 여자였다는 상대방의 말을 보란 듯이 꺾고 누군가에겐 아름답게 빛나는 보석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주문이 효과가 있는지 마음이 가라앉을라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훌훌 털고 일어났다. 그놈이 기가 죽을 만큼 더 멋진 사람과 결혼할 테니까. 분명 그랬을 텐데.


잊을만하면 꿈속에 영영 잊고 싶은 얼굴이 그려진다. 그러면 당장 모든 걸 그만두고 엉엉 울고 싶어 진다. 오래전으로 돌아가 언제 그랬냐는 듯 좋아하는 미소를 지어준 날은 더욱 그렇다. 오래된 친구도, 오래전 연인도 이제 곁에 없는 이들이 꿈속에서 다녀간다. 그러면 그날 아침엔 찬물로 샤워를 하는 것이다. 머릿속의 흔적이 모두 씻겨나가기를 바라는 것처럼. 애써 입가에 미소를 걸고 아주 옛날에 그랬던 적이 있다고 스스로 말해 본다. 담담히 하루를 시작하지만, 속으로는 참담하다. 한 때 사랑했던 모습을 남겨주어 감사해야 할까. 하지만 누군가 떠난 빈자리는 늘 입안의 약처럼 씁쓸하다. 사실 그들을 아직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잊는다는 건, 무뎌진다는 뜻이지 완전히 지워지는 건 아닌가 보다. 거울 속에 비친 공허한 나를 보며 더 이상 사랑 따윈 하지 않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해본다.


시간이 약이라며 무작정 버틴 일상에 케케묵은 사랑이 다녀갈 때마다 나는 언제나 물먹은 인형이 되어 추억 속 잊지 못할 장면에 멈춰 선다. 하루 종일 모래시계에 갇힌 사람처럼 잊을 수 없는 시간을 되돌리고 되돌리다 누군가를 마주 보며 눈부시게 웃는 내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다 역시 성급한 결정이 아니었을까, 하고 다시 누군가를 좋아하기 위해 노력한다. 미뤄두었던 소개팅을 잡고 정성껏 머리를 만지고, 예쁜 옷을 입는다. 그만두었던 화장을 다시 하기도 하면서 들뜬 기분을 낸다. '난 아직 사랑할 수 있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처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설레는 기분을 다시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하며 집을 나선다.


그런 날은 집으로 돌아와서 입었던 옷을 곧장 세탁 바구니에 넣으며 이런 생각을 한다. '역시 난 사랑을 할 수 없는 걸까.' 공들인 화장은 무척 마음에 들었고, 머리까지 완벽했다. 남자가 찍어준 사진은 당장에 sns에 올려도 괜찮을 만큼 잘 나왔지만, 그 사진을 sns에 올리진 않는다. 애초에 별로 사진 찍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몇 장 되지 않는 사진은 핸드폰 어느 구석에 흔적처럼 남아있을 뿐이다. 오늘 어쨌든 무사히 데이트를 끝냈다고 말이다.  사진을 보며 잠자리에 들 때까지는 '그래도 아직 날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다'라고 생각하지만, 다음날 아침이 되면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하루의 시작에 어제 찍은 사진을 지우게 된다. 그럼 그렇지,라고 말하며. 몇 번을 반복해도 항상 똑같은 결말이 내려진다. '나는 절대 사랑하지 못할 거야.' 그러다 보면 어느새 체념하게 되고, 내가 사랑을 원하지 않노라고 문신처럼 마음에 새겨둔다.


잘 보일 사람이 없으니까 길었던 생머리도 짧은 단발로 댕강 잘라버렸다. 짧은 머리는 긴 머리보다 손이 더 많이 간다는 사실을 아는가?  머리를 감고 나면 사방으로 뻗쳐서 더 정성껏 빗질을 해줘야 하고, 드라이도 해야 한다. 그럼에도 나는 거울을 보며 만족했다. 누구에게도 잘 보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을까? 스스로만 만족하면 되는 거니까, 처음으로 나 자신이 이쁘다고 느낄 수 있었다. 애석하게도, 머리를 자른다고 해서 사랑이 찾아오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나는 또 친절한 누군가를 만나게 되고, 친절한 사람에게 마음을 주게 되고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어 간다. 결말은 항상 정해져 있는데 알면서도 가는 마음을 잘라내는 게 쉽지가 않아서, 다시 또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고민을 하고 노력을 한다. 어쩌면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속이면서 말이다.


하지만 알고 있다. 사랑하기에는 겁이 너무 많고, 각자 지고 있는 삶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성인이 되어서도 아직도 길을 찾고 있으며, 밤에는 잠을 자지 못하고 누군가를 그리워한다. 그럼에도 서로의 옆에 누워 밤을 보낼 수 없는 건, 사랑보다 고민으로 지새우는 시간이 더 많기 때문이다. 결국 난 또 사랑을 했고, 그 사랑은 도착할 곳이 없으며 목적지 없이 헤매다 슬픈 소식을 가지고 내게 돌아올 것이다. 머리를 잘라도, 화장을 하지 않아도, 구두를 신지 않아도 나는 자꾸만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나를 사랑해 주길 바란다.


사랑하기 전에는 그럭저럭 만족하는 삶을 살다가, 꼭 사랑만 찾아오면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되어버린다. 완벽했던 나는 무언가 결여된 인간상이 되고 답이 없는 핸드폰을 기다리는 시간이 늘어난다. 언제나 나를 변호하는 스스로 역시 사랑의 부재중에는 조바심으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 질려버린다. 반복되는 무언가처럼 이별을 선언하고 떠나는 사람을 잡아보다 다시 내쳐진다. 나는 정말이지 결혼하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그 품에 기대어 잠도 자고 싶고, 잘하는 요리를 맛있게 먹는 그를 보며 다음 요리를 고민하고도 싶다. 그를 닮은 아이를 기르며 그와 나의 닮은 점을 찾고 사랑을 속삭이고도 싶다. 하지만 이번에도 난 사랑은 필요하지 않다고 선언하고, 또다시 끝이 정해진 사랑을 하게 되겠지.


혼자서도 외로워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면서도 한 편으로는 사랑하는 사람과 꾸려가는 화목한 가정의 모습을 상상하는 모순적인 시간이 반복된다. 언제고 이뤄지지 않을 것 같은 이 행복한 상상이 얼마나 더 반복되어야 혼자가 되어도 정말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아직 젊지만, 남들이 말하는 사랑 앞에서는 나약해진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려고 해 봐도 일일이 상처받는 걸 멈출 수가 없다. 그런 나를 너무 잘 알아서 아무도 좋아하고 싶지 않은 건데, 그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사랑을 하고 싶어도 세상은 자꾸만 앞으로 나아가고, 시간은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 놓는다.


'난 절대 다른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거야. 혼자서도 행복한 방법을 배울 거야. 이제 네 연락을 기다리지 않을 거야.’


그 말은 사실이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항상 사랑을 하고 있다.

그리고 항상 사랑을 하게 된다. 질리는 사실이다.

내가 정말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이 다쳐야 사랑에 미련이 없어질까.

외로움이 익숙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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