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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를 Feb 13. 2022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 되면 안 되는 이유

높이 쌓은 블럭은 반드시 무너진다.

 나는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곧잘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느끼곤 한다. 과거의 나는 그러한 비교 자체를 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했으며 그렇게 하게 되면 자책감과 자괴감의 구렁텅이로 스스로를 몰아넣었다. 그런데 지금의 내 생각은 다르다. 사회적 동물인 우리에게 비교라는 감각이나 판단을 결코 회피할 수 없다. 그래서 현재의 나는 이런 사실을 전제로 하며 이렇게 생각이 변하게 되었다.


전)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끼고 스스로를 자책과 자괴로 몰아넣는다.


)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끼고

그걸 자각한 나는 오늘 정한 할 일을 그대로 한다.


그러한 비교가 우월감으로 이어지든, 열등감으로 이어지든 나를 허영에 빠지도록 하거나 자괴에 빠지게 되는 등 내가 온전히 해야 할 일을 방해하는 건 사실상 다를 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나보다 잘하는 사람을 마주하거나 못하는 사람을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이 은밀하고도 본능적인 감각은 통제하는 게 가능할지 의문이 든다.




아무리 우사인 볼트가 경이로운 신기록을 세워도
비행기보다 빨라질 순 없다.


그래서 여러 자기 계발서에는 그런 타인과의 비교를 그만두고 과거의 자기 자신과 비교를 하라고 말한다. 요는 과거의 나와 비교하여 그에 대한 피드백을 스스로 제공하며 그를 토대로 성장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뜻을 함축시킨 건지 '어제보다 나은 지금의 내가 돼라'는 식의 동기부여식 명언이 인터넷에 많이 떠돌아다닌다. 그래서 내가 명언이라는 것을 가끔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다른 한편으로 반감을 느끼는 이유다. 우리는 당장에 소크라테스가 여러 번 인용하고 삶의 모토로 삼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언 조차도 그 깊이나 참뜻을 무시하고 해석한다. 일반인들 사이에서 이 명언은 단순히 침 발린 말이나 혹은 오락거리에서의 유머 소재로 전락한 지 오래다.


어쨌든 나는 어제보다 나은 자신이 되어라는 일종의 다짐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데 그 이유는 그 어떤 생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정해진 한계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빠른 동물'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치타를 떠올린다. 하지만 치타가 아무리 빨라져도 기차보다 빠를 순 없다. (게다가 치타는 지구력이 형편없어서 최고 속도로 오랜 시간 달리지도 못한다고 한다.) 위에도 적혀 있듯 우사인 볼트가 아무리 빨라도 기차나 비행기보다 빠를 순 없다. 우리가 노력해서 도달할 수 있는 정점은 한계가 존재한다. 여태껏 그래 왔다. 그리고 그 한계를 돌파하는 경우는 그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신기술, 신소재, 도구 등이 발명되었기 때문이며 우리는 이러한 사건을 혁명이라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해 수많은 혁명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해진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기본적인 한계가 '빛의 속도'이며 '시간'이고 '광활한 우주여행'이다. 이런 것들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이미 우주가 탄생했을 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인류사에 비교하여 너무나 최근에 우리는 이런 것들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단순한 꿈에 부푼 망상이라는 사실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우리는 우주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없으며 우주의 끝에 도달할 수도 없으며 빛의 속도 그 이상으로 이동할 수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인류가 수렵, 채집 생활을 하며 삶을 연명했을 때 일어났던 어느 천체의 현상의 빛이 지구에 다다를 때까지 손가락이나 빨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렇게 관측하게 된 천체가 지금 현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단순히 예측밖에 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리고 내가 직시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한계는 하루가 24시간이라는 사실이다. 인터넷이나 책에는 '하루를 30시간으로 보내는 법'이라는 둥 하루를 더 생산력 있게 보내는 방법을 시선을 끌어들일만한 제목으로 눈길을 끌게 만드는데 아무리 생산적으로 보내도 하루는 24시간이다.


만약 내가 아무리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1시간에 10페이지의 글을 쓴다고 해도 내가 하루에 쓸 수 있는 글의 양이 240페이지를 넘을 순 없다. 그렇게 쓰는 것을 꾸준히 반복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먹고 씻고 자는 일까지 합치면 당연하게도 그 정도로 많은 양은 쓸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그만큼 매일 집필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효율과 질의 균형이 무너진 단순히 형편없는 결과물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을 것이다. 난 내가 해야 하는 일의 양이 상당히 많은 시간을 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했고, 그걸 받아들인 순간 위의 예시처럼 내가 하루에 할 수 있는 작업량을 상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일일 작업량은 한계가 분명하다. 절대 욕심을 부리거나 자신을 과대평가해서도 안된다. '의지'나 '열정'을 가지거나 '인간에게 불가능은 없다.'라는 둥의 허영과 망상에 찬 말들에 대해서 나는 이미 독으로 인식하고 있다. 아무리 인류가 혁명적인 결과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고 해도 한 개인의 일일 업무량은 한계가 뚜렷하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많은 것을 성취하고픈 야망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더.




과거의 나와 비교해도
우월과 열등을 느끼게 되는 건 다를 바 없다.

그 어떤 대상과 비교해도 우월과 열등은 찾아오게 마련이다.


(처음 보는 딱한 사람에게도 헌신하거나 자신보다 나은 사람에게 경외를 표하는 것도 스스로 풍족한 자신 혹은 아직 부족한 실력의 자신과 상대를 비교했기 때문에 느낀 반응일 것이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비교를 통해 고통이나 허영을 느끼는 경우가 많기에 여기선 이를 전제로 글을 이어나가려 한다. 어쩌면 위 예시의 사람들도 우월과 열등의 감각을 느낀 뒤에 취하게 된 긍정적인 반응일 수도 있다.)


그것은 사실 자기 자신과의 비교에서도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간단한 예로 지금의 내가 어제보다 못하면 열등감을 느끼고 지금의 내가 어제보다 나으면 우월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는 아마 자존감과도 연관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만약 내가 어제보다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고 있고 거듭된 그 노력의 성공으로 인해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해도 결국 정해진 한계점으로 인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개선은 점진적이었겠지만 몰락은 한순간이라 심하면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다. 어쩌면 과거의 승승장구하던 시기를 전성기라 칭하며 무기력하게 신세한탄이나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노력했던 시기나 몰락한 후나 과거의 자신과 비교하고 있는 건 다르지 않다.




그냥 내가 그날 할 수 있는 이상적인
업무량을 냉정하게 상정하면 되지 않을까.


전보다 더 나아지려 노력하는 것보다는 그냥 지금 내가 실질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실천 가능한 양의 할 일을 계획하는 것이 더 이롭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 그 계획이 실패하게 되어도 자신을 자책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 계획은 애초부터 무리한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판단을 두고 어리석은 방어기제일 뿐으로 여길지는 자기 선택이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판단했고, 스스로 실패한 원인이 나 자신의 행동력 부족으로 인한 것이라 결론을 내렸으면 내가 할 수 있는 현명한 일은 스스로를 자책, 자괴라는 늪에 빠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실패하게 만든 환경적 요소를 조정하고 변화를 가하라는 것이다. 난 인간의 의지를 그리 신봉하지 않는다. 난 오히려 내가 처해있는 환경조건이 나에게 더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가장 간단하면서도 극단적인 예시를 들면 우리가 평소에 게으름 피우면서 미루는 일도 누군가가 실탄이 장전된 총구를 내 관자놀이에 갖다만 대도 나는 그 일을 당일날 바로 끝내고도 충분한 시간이 남을 것이다. 나를 움직이게 한 것은 죽지 않기 위한 나의 몸부림이겠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내 관자놀이에 총구를 갖다 댄 누군가라는 환경적 요인이었다. 결국 내가 계획 실천에 실패했을 때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환경이다.





난 군입대를 하면서 집에 틀어박혀 생활하던 때와 비교해 행동력이 극적으로 높아진 것에 나름 만족감을 느꼈고(우울과 공허의 감각은 여전하다.), 과거에도 이런 경우를 경험했지만 이제서야 이른바 '환경 결정의 법칙'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나름대로 구체화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휴가를 나오게 되니 이번에는 군입대 전 나태하고 게으르며 무기력하게 지냈던 시절로 극적으로 돌아온 것을 보고는 기이하고도 지대한 허망감을 느꼈다. '환경이 사람을 결정한다.'라는 가정을 더욱 확고하게 만든 경험이 되었다.


어쨌든 나는 계획 실패에 대해 그 원인을 나로부터 환경의 탓으로 돌리게 되어 다시금 계획을 냉정하고 실질적으로 재조정할 수 있었고, 자책과 자괴를 느끼되 스스로 늪에 빠져 그 감각을 더욱 증폭시키는 과오는 저지르지 않게 되었다. 물론 남들이나 자신과의 비교를 통해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끼며 간혹 고통을 느끼는 건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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