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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를 Feb 10. 2022

삶이 고통일 수밖에 없는 이유

고통 없는 삶은 아무것도 없는 삶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고통을 느끼며 그것에 대해 신음하거나 몸부림친다. 여기서 말하는 고통은 사고나 질병으로 인한 신체적 고통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에 대한 혼란이나 공허감, 자괴감, 자책감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정신적 고통을 일컫는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꽤나 기이하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체적인 결함도, 질병도 존재하지 않을 터인데 그럼에도 고통에 신음하며 참지 못해 탈선을 하거나 때로는 미쳐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신체적으로는 상당히 정상적으로 보인다. 어째서 사람들은 그런 보이지 않는 고통을 호소하며 혼란을 겪는지에 대한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이 세상 자체가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생물은 고통을 느끼고 그 순간 욕구가 발생한다.


정말 간단한 예시를 제시하며 설명을 해보도록 하겠다. 당신은 반나절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고, 이제서야 위장 속이 비어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하루 이상 금식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허기나 굶주림의 감각이 꽤나 고통스럽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방법은 간단하다. 부엌에 있는 냉장고를 열어 사과를 집어먹으면 된다. , 굶주림이라는 필연적이며 생리적인 고통이 발생함으로써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먹어야 한다는 욕구를 느끼게 된 것이다. 이는 수면욕도 마찬가지이며 성욕도 마찬가지다. 이는 생물이 종의 생존을 위해 불시에 끊임없이 발생하는 아주 기초적인 욕구이며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기에 개인의 의식, 이성으로는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하며 모든 생물이 그렇게 작동한다. 그 어떤 행동도 욕구에 기반하지 않는 행동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행동조차 말이다.





열정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고통을 추구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고통이 신체적 고통이 아닌 정신적 고통의 범주를 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주었으면 한다. 스스로가 신체적으로 고된 일을 추구하고 감수하는 것은 사실 큰 문제가 없긴 하지만 자신의 몸을 날붙이로 상처를 내는 고통은 무가치한 자해에 불구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나는 스스로 열정을 불러일으키거나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욕구를 상승시키기 위해서는 오히려 고통을 추구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의 주요 근원은 사실 두려운 일이나 도전적인 일에 몸을 내던지는 일이 아닌 위에서 언급한 필연적이며 생리적인 욕구의 절제를 기반으로 한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는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없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지금의 삶이 생리적으로 너무나 풍족하다 못해 범람하는 수준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특정한 나라의 특정한 계층에 국한된 이야기이기도 하겠지만 내가 나의 삶을 비춰보면 확실히 그랬다. 먹을 것은 풍족하다 못해 남아돌았고, 질 좋은 수면은 개인 방과 침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장된 일이었고 배설도 전혀 문제가 없었고 성욕도 사실 성인이라면 누구나 쉽고 간편한 경로를 통해 해소하는 것이 가능했다. 생리적인 고통이 발생하면 그 즉시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생활이 너무나 풍족했고, 덕분에 대부분의 욕구가 상시 해소된 나는 행동할 이유가 없었다. 그걸 두고 난 스스로를 무기력한 사람으로 단정 짓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 풍족한 삶을 구축하려는 것에 가장 큰 장애물이 있다면 그건 지금의 삶이 너무 풍족하다는 것이다. 필요하면 곧장 얻는 것이 가능하고 곧장 해소하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직장생활이나 단체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적잖은 제약이 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제약이 나로서는 꽤나 의미 있다고 여기는데 지금부터 그 제약이라는 것에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우선 요점만 말하자면 지금의 우리 현대인의 삶은 생리적으로 너무나 풍족하기 때문에 뭔가에 대한 욕구나 행동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그 풍족함을 포기함으로써 제약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굳이 제약을 둬야 하는 이유는 지금의 사회나 집단이 개인의 욕구에 지나칠 정도로 편의와 안위를 보장해주려고 노력하는 나머지 그것이 지나칠 정도로 과하기 때문이다. 너무 거창하게 표현했지만 이는 우리 주변에서 충분할 정도로 관찰할 수 있다. 부모는 자식이 건강하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에서 밀가루, 유제품, 설탕이 포함된 음식을 먹이고 때로는 소화할 시간이 필요할 때나 자야 할 때도 그러한 음식을 제공한다. 그러한 식습관이 건강에 악영향을 주는지는 인지하지도 못한 채로 그저 많이 먹으면 무럭무럭 자라겠지 하는 틀에 박힌 고정관념으로 자식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조직문화에서는 회식과 술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고, 사회생활에서 타인, 특히 상사가 선물하거나 사주는 간식거리는 거절하기 힘들 것이다. 나는 특정한 목표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와 관련 없는 대부분의 욕구를 단절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려는 욕구도 지금의 자신과 현실에 대해 일종의 불만족감(고통)을 느꼈기 때문에 열정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욕구를 충족시키면 목표에 대한 욕구도 반감되기 마련이다. 극단적 예시로 술이나 마약에 중독된 사람, 게임에 빠진 사람은 간혹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원활했던 인간관계도 포기해버린다. 그런 활동에 대한 쾌락이라는 보상이 다른 욕구들마저 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는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깊이 와닿는 것이지 나의 경우에는 다양한 생리적이거나 충동적인 욕구들을 적당히 해소하며 지내는 동안 목표에 대한 욕구가 서서히 경감되는 것을 관측했다. 그 당시에는 너무 점진적이라 인지할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실패하고 나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그러한 사소한 습관들로 인해 자신을 점진적으로 파멸로 이끌어나간다는 것을 알고는 큰 고뇌에 빠졌다. 나 자신의 문제도 문제이지만 그러한 욕구를 자유로이 해소할 수 있는 주변 환경도 문제였다. 주변에 유흥업소나 식당이 줄지어 있는 도시에 사는 사람보다 주변에 나무나 풀밖에 없는 절에 사는 사람이 더욱 절제되고 건강한 삶을 살 확률이 높다. 확률이 높다고 표현한 이유는 전자라고 해서 절제되고 건강한 삶을 살지 못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후자보다 전자는 그 유혹에 더욱 견뎌내야만 하며 그 도시의 문화에 반기를 들어야만 하기에 소외되거나 고립될 확률이 높고 강한 스트레스를 받을 확률이 현저하게 높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환경의 문제이다. 그래서 전자에서 말한 도시에서 살 수밖에 없다면 나는 차라리 그 문화의 유혹에 반기를 드는 쪽을 택하는 편이 나의 목표나 가치관을 고려해봤을 때 더욱 낫다고 본다. 이것이 내가 편의를 내던지고 절제를 통해 고통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다.





나는 나 자신이 지나칠 정도로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누릴 수 있는 쾌락을 누리는 동시에 멀고 험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는 게 나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사사로운 쾌락은 미래를 향한 욕구를 경감시키게 될뿐더러 소리 소문 없이 나 자신을 파멸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파멸이란 흔히 사람들이 겪는 무기력, 공허감, 권태감으로 인해 미래를 스스로 포기해버린 상태를 말한다. 나에게 있어서 파멸이란 현재의 쾌락에 찌들어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 감수해야 할 고통을 포기하고 쾌락이나 추구하게 되는 상태를 일컫는다. 위에서 말했듯이 우리 주변에는 누릴 것이 많다. 원할 때 먹고, 자고, 게임하고, 담배 피고 술 마시고. 이러한 것들을 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이롭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저 감각적으로 쾌락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욕구들이 당장은 해소되고 충족되었더라도 또다시 그것에 대한 욕구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단 한 번의 충족으로 모든 것이 깔끔하게 해소되었더라도 나는 그것을 추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포만감은 다시 굶주림으로 바뀌고 풍족한 수면을 취해도 결국에는 다시 피곤해질 것이다. 성욕을 해소해도 끊임없이 발생할 것이며, 남들에게 인정을 받더라도 곧 공허감이 들어 다음에는 더 큰 인정을 받고 싶어지는 법이다. 나는 차라리 이 모든 것을 창밖으로 내던지고 스스로 부족감을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래야만 그것을 채우기 위해 열정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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