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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를 Feb 10. 2022

그 어떤 고통도 견뎌내는 방법

고통의 정도는 고통에 대한 당사자의 판단에 의해 극과 극으로 갈린다.

단체생활, 혹은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분명 같은 문제에 봉착했는데도 누군가는 초연한 반면 다른 누군가는 끔찍이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후자의 유형은 전자의 유형들에게 별것도 아닌 일에 뭐 그렇게 힘들어하냐며 질책받기 십상이다. 다만 알아둬야 할 점은 후자의 유형은 단순히 남들에게 관심을 받기 위해 엄살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정말 누구보다 고통스럽기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이다. 같은 문제를 끌어안고도 왜 누구는 초연하게 넘기고 누구는 고통스러워하는 걸까?




고통이라는 것의 메커니즘


우리는 항상 무언가에 대한 욕구를 끌어안고 산다. 먹고자 하는 욕구, 잠을 자고자 하는 욕구, 성관계를 하고자 하는 욕구, 남들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 내가 원하는 목표를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 등 다양하게 존재하며 이 감각을 누구나 자각은 못할지언정 잘 체험하고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욕구들은 기본적으로 고통을 전제로 하여 발생하게 되는 것들이다. 즉, 굶주림, 피로감, 욕구불만(성욕은 개체의 의지를 무시하고 유전적으로 발생시키는 고통이라는 것이 지금의 나의 생각이다.), 공허감, 불만족감 등으로 인한 고통이 먼저 발생하여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소를 위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 행동의 성공은 쾌락을 발생시키고 그 쾌락은 만족감과 함께 욕구의 강도를 상쇄시킨다. 하지만 또다시 그 욕구는 강하게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생물은 욕구에서 벗어날 수 없고 끊임없이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는 숙명인 것이다. 심지어는 고통이 발생하기 전에 해소해버리려고 애를 써도 말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고통, 제목에서도 말했듯이 견뎌내고자 하는 고통은 위에서 설명한 생리적인, 유전적인 고통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뒀으면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상쇄 가능한 고통, 약화시키거나 발생 자체를 통제할 수 있는 고통은 판단으로 인한 고통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상황 : 상사는 A에게 다른 이의 업무를 대신 처리하라고 했을 뿐 아니라 당연한 듯이 야근을 강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A는 강한 불만과 불합리함으로 인한 고통을 느끼며 업무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할 일만 빠르게 처리하고 집에 가서 쉬고 싶은 욕구, 혹은 TV나 게임을 하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사의 강압으로 그 욕구는 좌절되었다. 우리가 흔히 느끼는 정신적 고통이라는 것은 이 순간에 찾아오는 것들이다. 즉, 욕구의 좌절에 대한 자신의 부정적인 판단, 불합리함에 대한 자신의 부정적인 판단이 자신의 작았던 고통을 더욱 증폭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의 유무, 강도의 차이가 같은 상황에서도 서로 다른 정도의 고통을 느끼는 이유다.




대부분의 자기 계발서에서

마음챙김을 강조하는 이유


마음챙김 명상이라는 명상 기법이 있다. 이는 유명한 자기 계발서를 몇 권 읽어보면 쉽게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마음챙김 명상이란 자신의 호흡이나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며 주변의 사물, 지금 드는 좋거나 나쁜 생각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활동을 말한다. 특정 생각이 들더라도 그것을 스스로가 자각하고 그 생각을 내려놓고 다시 자신의 감각이나 호흡에 집중하는 것이다. 나도 마음챙김 명상에 대한 정보를 얻고 나서 적잖이 실천해가며 극적이진 않아도 사소한 효과들을 많이 누렸던 기억이 난다. 다만 그때는 왜 그렇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것인지 자각하지 못한 채로 그저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무작정 실천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서야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마음챙김 명상은 사물, 상황에 대한 판단을 멈추게 해준다. 즉 위의 예시를 통해 설명했던 욕구의 좌절에 대한 판단, 불합리함으로 인한 판단을 차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같은 불합리한 상황에서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그 불합리한 상황에 대해 불만이나 분노, 격정의 감정을 느끼지 않았거나 혹은 느꼈더라도 스스로 자각하고 내려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애초에 자신의 가치관과는 관련 없는 상황이거나 혹은 성격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자에 속할 거라 생각한다. 즉, 스스로 그 불합리함에 대한 자신의 격정적인 감정을 잘 자각하고 내려놓으려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보고 현명하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말 그대로 상황을 부정적으로 판단하여 쓸데없는 고통을 증폭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나는 군복무를 하게 되지 4개월이 지났는데 (요즘 군대는 정해진 시간에 휴대폰을 불출해주는데 그래서 그런지 개인 여가시간에는 모두 침대에 누워 휴대폰 삼매경이다.)주변 사람들을 보면 모두 전역하기를 갈망하거나 어떻게든 불필요한 업무를 하는 것을 기피하며 만약 그런 상황이 생기면 한숨을 쉬며 끝없이 불평불만을 늘어놓는다.(물론 모두가 그런 것이 아니라 소수의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다.)그리고 나 역시 그런 불합리감을 계속 느끼고 있는데 이유는 내가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로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독서나 글쓰기, 음악을 듣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의 활동이었다. 난 통제나 업무, 혹은 암묵적인 눈치(이것이 가장 골치 아프다.)로 인해 그런 활동들을 억압받았다. 하지만 이런 것들에 대해 내가 불평불만을 한들 이 조직이 갑자기 개방적으로 변하여 내게 모든 것을 누릴 자유를 줄 리는 만무했다. 게다가 그렇게 만들기 위해 조직 최하위 말단인 내가 개혁을 위해 노력하려 한들 반항심 그윽한 부적응자로 낙인찍힐 뿐이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처세는 그저 그런 부조리, 불합리, 도저히 믿기 힘든 판단으로 인한 스케줄 변동 등에 대해 판단을 그만두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한낱 개인이 꾸준히 노력해서 변경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설령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내가 정말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을 모두 내던지고 그런 미미한 개혁을 위해 나의 모든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아무리 터무니없는 상황이나 부조리가 발생해도 그저 그러려니 하며 큰 판단을 하지 않고 넘겨버린다. 이러한 처신이 마음챙김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지는 잘 모르나 부정적인 판단으로 인한 고통을 줄여주기는 한다.





사실 이러한 방식의 처신법은 인간관계에서 소외되기 십상이다. 남들은 슬퍼하는 와중에 혼자 태연하게 있다거나 불평해야 할 상황에서도 딱히 목소리를 올리지 않으니 일반적인 사람들은 당연히 반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일반적인 결과만을 도출해낼 뿐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는 좀 더 특별한 것을 원한다. 다수가 추구하는 일반적인 뭔가가 아닌 소수가 추구하는 특별한 뭔가를 원한다. 그것을 두고 특별하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탁월해서 그렇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소수의 사람만이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수의 추구는 다수의 사람에게 매도당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이치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올곧게 추구하며 일반인들의 질책, 비난을 위의 방법으로 적절히 처신하여 초연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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