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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이 중헌데

단벌 신사여도 괜찮아

by 뉴로그림

아이를 낳고 나는 사라졌다. 아이의 일상이 나의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은 아이의 스케줄에 따라 움직였다. 아이가 보채면 일어나 분유나 젖을 주고 아이가 잠들면 집안일을 하는 등의 주부의 삶을 살아야 했다. 모든 것은 아이 중심이었다. 아이가 얼굴을 만지기도 하고 뭘 묻힐 수도 있기에 좋은 옷이나 액세서리, 화장 같은 것은 의미가 없어졌다. 그렇다. 의미가 없어진다. 상황에 따라 모든 가치의 우선순위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미국에 와서 느낀 점은, 사람들은 겉치레에 그리 비중을 두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갓난아이를 키울 때와 같은 행색으로 다녀도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고 심지어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누가 어떤 명품을 걸쳤는지 들여다보지도 않고 지나친 관심을 보이지도 않는다. 다문화로 이루어진 이곳은 각자의 문화에 맞는 옷차림을 하고, 그것이 얼마이든 상관없이 합리적인 용도에 맞으면 그만이다. 1년 지낼 옷을 가지고 올 때, 정말 단출하게만 챙겨 와서 (여름옷 두어 벌, 가을 옷 얇은 거 두꺼운 거 한두 벌씩, 뭐 이렇게) 필요하면 사지 뭐 하는 마음이었는데 와 보니 정작 살 일이 없다. 여러 벌, 좋은 옷, 이런 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의미가 없다. 멋지게 입고 나갈 곳도 없거니와, 출근도 다들 그냥 편안한 차림새로 하니까 남편 와이셔츠 다릴 일도 없다. 모든 물품이 다 있는 테이크오버였는데도 다리미는 없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쓸모가 없으니까. 다릴 일도 없고 입을 일도 없다.


대도시 뉴욕에 가려고 해도 그냥 입던 옷 입고 조금 머리만 단정하게 정리하고 나가면 그만이다. 학교 행사가 있어 학부모들이 함께 하는 자리에도 그냥 입던 옷 입고 조금 매무새만 단정하게 나가면 그만이고. 한국처럼 명품을 걸치고 나타나거나 치렁치렁하게 하고 오는 엄마는 아무도 없다. (물론 동네마다 차이가 날 수는 있겠지만) 거품이 없을 수밖에 없는 이 환경은 월세와 생활비 만으로도 버거운 물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회적인 분위기도 작용하는 것 같다. 합리적인 소비, 용도에 맞는 정도의 옷차림 정도면 충분하다. 겉치레가 전혀 중요하지 않은. 내게 중요하지 않아도 주변 모두가 신경을 쓰면 자연히 나도 따라 신경을 쓰게 되는데, 모두가 신경 쓰지 않는 환경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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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미국의 꽤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정말로 돈이 많고 부유하다면 기부를 많이 하거나 (도네이션을 할 수 있는 곳은 곳곳에 널렸다) 다른 방식으로 플렉스 할 수 있고, 겉치레로 플렉스 하지는 않는 분위기. 문득 한국에서 명품으로 치장하거나 명품을 언박싱하는 콘텐츠로 몇 만씩 구독자들이 생기고 하는 문화가 외국에도 흔한지 궁금해졌다. (뭐 찾아보지 않아도 물론 있기야 하겠지) 어디든 허영심을 자극하는 문화는 있기 마련이겠지만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인식의 차이는 분명해 보인다.


명품 가방을 하나도 가져오지 않았지만 가져왔어도 사실 쓸 일이 없었을 것 같다. 지금까지 지내온 바로는 그렇다. 트레이더 조에 파는 저렴한 에코백이 오히려 유행템이 되는 이 상황이 나는 더 재밌고 즐겁다. 비싸고 아껴 입어야 할 것 같은 명품 옷보다, 싸고 질 좋은 건조기를 돌려도 살아남는 옷들이 더 가치 있는 상황. 여기서도 상류층이 되어 경제적인 여유가 넘친다면 가치의 우선순위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무르익어간다. 장점 찾기보다 단점을 더 많이 찾게 되는 초반이었지만 점차 장점이 눈에 띄기 시작하는 시기인가 싶다. 각종 총기 사건도, 정치 싸움으로 인한 행정부 셧다운도 뉴스에서나 볼 법한 먼 나라 이야기를 바로 같은 하늘 아래에서 경험하고 있지만, 환율이 치솟는 등 상황이 조금 좋지 않은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점 몇 가지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매일 사계절의 변화를 직접 집 안에서 관찰할 수 있다는 환경도 장점이다. 마당에 있는 낙엽을 쓸고, 쌓여 있는 눈을 치우며, 계절을 몸소 느끼며 살아갈 수 있다. 실제 이곳에서 일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근무 조건이나 환경 등이 한국 직장 문화에 비해 여유롭다는 점도 장점이 될 수 있겠다. 모든 면면에는 장단점이 있다. 아직까지 누구나 연수 기간의 연장을 원하며 더 오래 있기를 바란다는 사실에 사실상 공감하고 있지 못하지만, 우리도 돌아갈 무렵에는 바랄지도 모르지.


추신. 멤버십을 해지하였습니다. 세상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 +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이 무슨 소용인가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멤버십을 유지해 준 분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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