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고 보드라운
부끄럽지만 식탐이 많은 나는 소화력에 비해 먹고 싶은 것이 늘 차고 넘친다.
단적인 예로 여행에서 가장 궁금한 공간이 바로 현지 마트인데, 식료품 코너에 머무는 내 눈과 손은 홀린 듯 바빠진다.
그중에서도 흰 우유와 수프는 맛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대상이다.
원체 크리미한 것을 좋아하는 성향도 성향이지만 어릴 적 기억도 한몫 차지하고 있는데, 당시 형성된 설렘은 끝을 모르게 유효한 상태다.
대표적 감흥 하나는 디즈니 동화 <단추로 끓인 수프>로 온갖 재료가 들어가 먹음직스럽게 걸쭉히 완성된 수프다.
루(Roux) 베이스의 크림수프를 좋아하던 나는 한 솥 가득 등장한 수프 맛이 감질나게 궁금했었다. 그림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면, 종국에는 단추를 따라 넣고 싶을 만큼.
여기에 영화 <헨젤과 그레텔>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나는 '생크림'이라면 사족을 못 쓰던 어린이였다. 생크림 케이크, 아이스크림, 크림수프 등 '크림'자가 붙는 모든 것을 편애했다.
그러한 내게 영화 초입에 등장하는 하얀 크림은 앞으로의 이야기 대신 같은 장면을 되돌려 볼 만큼 매력이 흘러넘쳤다.
장면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른 아침 수레 한가득 커다란 통들이 실려온다. 통 안에 담긴 정체는 목장에서 갓 짜온 신선한 우유.
이윽고 뚜껑이 열리며 노동의 결과물이 공개되는데, 하얗고 꾸덕한 크림막이 우유를 덮고 있다.
일손을 거든 그레텔에게 아빠는 수고의 대가로 나무 스푼 가득 크림을 떠 먹여준다.
수혜와 같은 크림을 한 입 가득 삼킨 그레텔의 눈동자가 윤슬처럼 반짝인다. 자동으로 번지는 표정에는 모든 만족이 담겨있다.
어린 내게 <헨젤과 그레텔>의 명장면은 우여곡절 끝에 엄마 아빠의 품에 안기던 남매보다 뚜껑을 열자 뽀얀 속살을 드러내던 크림이었다.
이후 많은 버전의 <헨젤과 그레텔>이 각색되어 나오면서 유년의 버전은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추억 속 나의 명장면 역시.
이처럼 영화나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맛에 있어 동심의 기억을 따라잡을 무언가를 아직 만나지 못했다. 사유가 무엇이든 마음은 변하지 않고 있다.
상상을 관통하는 하얗고 보드라운 추억이 영화 이상의 영화로운 맛으로 내 안에 살고 있듯이.
*대문 이미지 출처: pexel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