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를 기억하며
순간 거짓이라 생각했다. 아니 바랐다. 누군가 보낸 고약한 스팸일 거라고.
본인상이라는 알림에 엄두가 나지 않은 나는 그 애의 얼굴을 떠올렸다.
H가 빙긋이 웃고 있었다.
믿기 어려운 마음에 한참을 망설이다 메시지를 열었다.
프로필 속 그 애가 아내를 향해 빙긋이 웃고 있다.
재처럼 남은 소식을 확인하며, 살이 오소소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 애가 겪은 어둠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장례식장으로 가는 내내 오한과 두통이 감돌았다.
그 애 생각을 하면서도 남겨진 가족의 현실에 실상 마음이 더 쓰였다.
그럼에도 떠나는 마음과 남겨지는 마음을 나란히 놓고 본다면, 모든 슬픔의 무게는 동등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H는 나보다 어렸지만 누구보다 속이 깊은 아이였다.
쉽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도, 부정의 표현을 하는 법도 없던 그 애는 저음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조용히 안부를 묻고 빙긋이 웃던 아이였다.
누군가에게 H를 설명한다면, '점잖고 선한 아이'라는 표현이 먼저였었다.
그 또래에 어울리는 표현은 아니었지만 H에게만큼은 퍽 들어맞는 표현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안부를 나누진 않아도 잘 지내고 있길 바라는 후배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H가 우리를 모아주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반가운 자리가 그 애가 떠난 자리라는 사실에 허망해했다.
어린아이들을 위해 그 힘든 항암의 반복도 계속해 의지를 다졌다는 말에 우리는 잠시 숙연해졌다.
그 애의 오랜 투병을 우리 누구도 모르고 있었다. 그마저도 H다웠고, 우리는 자성했다.
H와 꼭 닮은 얼굴의 남동생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H가 살아있는 것 같아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사는 게 무엇일까.
일상에 성실한 시간은 때론 물이 차오르는지도 모르다 젖어버리듯 주위를 잊게 한다.
내 반경 안의 일상이 곧 삶의 전부가 된다.
관계의 고요에 탄력이 붙고, 정신을 차려보면 우리의 공백은 무참히 몇 년을 삼킨 후다.
공백은 약과일 뿐, 미처 돌보지 못한 친구의 아픔을 발견하는 순간 동요가 몰려온다.
그 순간만큼은 그것이 본마음이 아니었단 진실보다 나의 불찰에 더 힘이 실린다.
우리는 H가 견뎌온 시간에, H에게 같은 마음으로 사과했다.
남은 가족들이 잘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의 크기처럼 그리움을 남겼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미열처럼 몸의 한기가 가시지 않은 나는 놓치지 않을 안부를 부지런히 곱씹었다.
이 후회가 재발하지 않도록, 미련이 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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