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는 저명하고 권위 있는 누군가의 단언으로 시작한다. ‘신은 죽었다’라든가 ‘예술의 죽음’이라든가. (여기서 ‘예술의 죽음death of art’은 단토가 아닌 편집자가 사용한 단어라는 점은 잠시 넣어두기로 한다) 니체의 선언이 초월자의 시대를 끝내고 이성과 주체의 근대를 이륙하는 태동기의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면, 단토의 선언은 죽은 예술 이후의 ‘예술’, 즉 포스트-예술의 시대를 낳았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종말을 선언하면, 어떻게 될까? 인간 종말 선언이 이루어지면 현대 이후의 인간, 포스트-휴먼의 시대가 도래한다. 바야흐로 인간 종말의 시대다.
“지금은 꼭 전간기 같다. 1차대전과 2차대전, 두개의 거대 전쟁 사이엔 조짐이 아주 충만했지. 그런 조짐을 느껴. 세계가 곧 한번 더 망할 것이라는 예감이 있는데 그게 굉장히 확실하다. 또 망할 것 같고 이번이 되게 결정적일 것 같다는…… 그런 예감이 있어. 너 전간기 예술가들의 작업을 봐라. 특히 음악 하는 사람들, 클래식 재즈 할 것 없이…… 종말을 앞둔 사람들처럼 노래하고 연주를 해. 그들은 확실히 뭔가를 느낀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황정은, 〈d〉, 《디디의 우산》 수록, 창비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렬을 막기 위한 차벽 옆을 지나면서 박조배는 말한다. 지하와 지상의 연결 통로를 막고 서 있는 경찰을 피해 걷다 국화를 들고 철조망을 오르는 사람들과 함께 철조망까지 넘지만, 결국 격벽을 넘지 못하고 박조배와 청계광장에서 들리는 함성을 들으며 d는 “혁명을 거의 가능하지 않도록 하는 혁명”(같은 책)을 떠올린다.
이탈리아로 유학까지 다녀왔으나 명동 길거리의 수레에서 음반과 양말을 파는 박조배의 말이 무언가를 후벼 판다. 종말을 앞둔 사람처럼 노래하고 연주하는 예술가들.
문화예술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왜인지 모르게 황정은 작가의 단편소설 〈d〉의 박조배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왜 문화예술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할까? 이미 저명한 예술가와 철학자 들이 전 분야에 걸쳐 문화예술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묻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끊임없는 질문은 무언가의 조짐이기도 했다. 종말을 앞둔, 그러나 왜 지금, 그리고 왜 종말일까.
인간은 모든 것에 의미를 찾고자 한다. 절대자인 신, 즉 자연의 법칙을 알고 싶어하고, 인간 주체에 관해 탐구하려고 하며, 주체로서 인간과 타자로서의 세계를 인식하는 법을 이해하고자 한다. 진리를 향한 탐구는 어린아이가 일 더하기 일을 배워야 구 곱하기 구를 이해하는 것처럼, 더 어려운 답을 찾아가는 순차적 행위라 믿는다. 근대 이후 인간들에게는 언젠가 개인인 ‘나’가 아닌 ‘인간’이 진리를 깨우칠 수 있다는, 거시 집단이 이륙할 진보에 대한 믿음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배반한다.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상상할 수 없을 규모의 사람들이 죽고, 공동체는 무너지고 스스로 ‘어느 정도는 된다’라고 생각했던 진보, 이상, 이성의 가치들은 몰락한다. 세계의 보편언어가 되고자 했던 순수예술 또한, 자신의 의미를 새롭게 개척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 더 이상 세상을 외면할 수 없다.
순수한 아름다움을 탐구하던 예술에 맥락context이 개입하고, 이것이 예술의 형식을 뛰어넘었을 때, 원래는 예술이 아닌 것이 예술이 되었을 때. 더 나아가 예술이 되어야만 할 때, 우리는 ‘조짐’을, 어떠한 ‘예감’을 느낄 수 있다.
“예술의 역사는 부친살해의 역사”(최병학(2018), 〈포스트휴먼 시대의 예술-기술적 상상력과 딥드림, 그리고‘새개념’미술〉, 《철학논총》, 92(2), p.283-391)다. 예술의 목적성은 종말이며 종말을 향해 가는 여정 자체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충돌의 불협화음은 예술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특성이다. 예술이 ‘부친살해의 역사’라고 했을 때, 예술이란 ‘나’ 이전부터 존재한 세계의 규칙을 내 손으로 죽이며 주체의 주권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내게 문화예술이란 정치·사회적 맥락이 내재화되어 개념이 매체medium를 압도했을 때,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가 흐려진다는 뼈아픈 단점에도 불구하고) 재현되는 기존 이데올로기의 종말이자 그 이데올로기에 추방당해 보이지 않았던 존재들에 대한 새로운 재현이다. 그러므로 문화예술은 인간 종말 선언 이후의 포스트-인간이다.
우리가 포스트-인간의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보통 사이보그와 같이 기계에 결합한 인간이나, 뇌의 시냅스 연결망을 네트워크에 스캐닝하여 유한한 신체를 떠나 불사가 된 인간-데이터를 상상한다. 혹은 신체 강화를 통해 영웅이 된 캡틴 아메리카 같은 존재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트랜스-휴머니즘적 관점은 이전 인간의 정상성 개념에 충실하게 복무한다는 지점에서, 결코 새롭지 않다. 포스트-인간의 조건은 인간의 경계선에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상성의 영역에 돌을 던져 금을 내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SF 영화나 소설 속의 새로운 존재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내 눈에 가려 보이지 않는 이들을 다시 ‘인간’이라는 범주로 재수용하는 과정이다.
“툴을 쥔 인간은 툴의 방식대로 말하고 생각한다.”(황정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디디의 우산》 수록, 창비) 문화예술은 우리에게 인간 종말 이후 포스트-인간에 대한 도구tool를 제공한다. 이것은 기존의 서구 백인 이성애자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된 이데올로기의 내러티브에 기대지 않고 포스트-인간 스스로의 내러티브에게도 ‘신화’라는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며, 이 신화라는 도구로 공동체는 이들, 즉 포스트-인간을 매끄럽게 수용한다.
전후戰後에 예술의 새로운 정의를 찾아 다다이즘이라는 반-예술주의 문화가 등장하였다. 세계에 커다란 상흔이 존재하고 모두가 그것을 목격했을 때, 예술은 자신의 의미를 다시 찾아 헤맨다. 그렇다면, 문화예술의 정의를 갈구하는 지금 우리가 공통으로 마주한 상흔은 무엇일까?
원자화된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우리에게 공통적으로 남은 사회의 상흔이 있다. 독재체제에 저항한 1980년의 5·18민주화운동에서부터, 선진화된 민주주의 체제를 이뤘다고 믿었던 2009년 공권력이 시민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사망자가 생긴 용산참사, 《디디의 우산》에서 언급하는 세월호 참사, 그리고 작년의 이태원 참사까지. 이 상흔들은 제대로 추모되지 못하고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아 책임소재가 밝혀지지 않고, 이를 요구하면 배후세력(시대의 변화에 따라 빨갱이부터 민주당 지지자들까지 다양하다)의 음모, 정치적 공작, 금전을 노린 의도적 행위, 피해자 개인의 문제이자 잘못 등등의 정제되지 않은 비난을 받는다.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사회에서 ‘과연 내가 2023년의 대한민국이 생각하는 인간인가?’라는 의문은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대한민국 국민 이전에 인간인가.
보수 진영은 지하철 4호선에서 이동권 투쟁을 벌이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을 시민에게 피해를 주는 가해자로 만들고 시민들을 무고한 피해자로 재프레임화한다. 이때 장애인의 이동권을 무시하여 이들에게 주어진 권리를 억압하는 실제 책임 소재자들은 가해자도 피해자도 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사건에서 제3자, 구경꾼보다 못한 존재로 지워진다. 연세대학교 청소노동자들의 파업이 수업권을 방해했다며 고소한 학생을 지지하며 노동자 혐오를 쏟아내는 이들의 언어는 여성·노인·아동·성소수자 혐오의 언어와 소름 끼치도록 유사하다.
모바일 게임 ‘림버스 컴퍼니’의 남성 이용자들은 캐릭터의 의상에 노출이 적다는 이유로 해당 회사 일러스트레이터들의 개인 계정을 찾아 사상검증을 하고, ‘낙태죄 폐지 옹호, 불법촬영 반대’라는 상식적으로 수용가능한 입장을 표방한 글을 문제 삼았다. 이들의 행위는 별점 테러로 이어졌고, 게임 회사는 해당 일러스트레이터와 계약을 종료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유부터 결과까지 납득 가능한 행위가 존재하지 않은 이 일련의 사태 속에서, 내가 느끼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은 이를 용인하고 부추기는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작동하는 이데올로기 속의 ‘인간’과 나의 괴리 속에서 나를 세상에 납득 가능하게 만드는 신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타자인 내가 주체로의 복권을 주장할 때 얻게 될 상상 가능한 비난과 이를 동조할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다시 깨닫게 될 사회 밖의 보이지 않는 타자의 위치를 어떻게 사회 속으로, ‘인간’ 안으로 들여올 수 있을까? 이 물음을 두 번째 질문인 아트인사이트에서 에디터를 하는 이유에 달아본다.
랑시에르가 말하듯 미학은 곧 정치적인 활동이다. 공동체에서 보이지 않는 주체와 타자의 선을 끊임없이 재현하며 감각 불가능한 존재인 타자를 볼 수 있도록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 행해져야 한다. ‘주고’ ‘받는’ 자의 구분은 존재하며, 이러한 이질적인 여러 공동체의 합이 사회가 된다.
이것은 ‘다름’을 지우는 일이 아니다. ‘다름’에 그 이유를 묻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기존의 언어체계를 이용하여 설명하라는 폭력적인 태도를 지우는 일이다. 감각되지 않은 존재에게 주체들만 얻을 수 있는 ‘논리’와 ‘이성’의 이데올로기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들의 언어는, 이들의 글쓰기는 ‘논리’와 ‘이성’이 부재한다는 평을 주로 듣는다. 이어 공적인 영역이 아니라거나,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라던가,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지 않냐는 비판 아닌 비난도 함께한다. 이에 대항하는 나의 도구는 글이고 도구의 방식은 글쓰기다. 문화예술의 부친살해 신화에 힘입어 ‘논리와 이성’의 아성을 ‘감각과 경험’이라는 이종어異種語로 대체한다.
포스트-휴머니즘은 기술의 발전을 토대로 “비물질적인 주체와 물질적인 신체를 통합하고 새로운 형태의 인간 이해, 인간 구성의 틀을 마련”(김은령, 《포스트 휴머니즘의 미학》, 그린비, 2014)하며, 도구라는 기술적 토대가 인간이라는 주체 개념을 재규정하는 역설적 관계를 구성한다. 기존 ‘포스트-휴머니즘’의 미학은 제도화된 예술계가 평론하던 방식인 숭고sublimity와 쾌pleasure로 더 이상 설명되지 않는다. ‘인간 종말 이후 포스트-인간 선언’ 또한 미학적 가치의 기준을 사회정치적 맥락 속에서 추방된 타자의 사회 속 공간 재점유를 가능케 하는 내러티브 생산으로 둔다. 내러티브가 신화가 되고, 이데올로기가 될 때, 예술의 부친살해 역사 속에서 우리는 성공적으로 ‘인간’이라는 폭력적 정상성의 개념을 살해하고 포스트-인간의 시대를 개막할 수 있다.
인간 종말을 선언함으로써, 우리라는 느슨한 공동체로 묶인 이종들은 ‘인간’이 된다.
[원문 링크]
아트인사이트, [ART insight] 인간 종말 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