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끝의 버섯》
인간이라는 종은 무엇이기에 산림을 파괴하고 바다를 오염시켜 지구를 멸망시키는 걸까? 신자유주의와 결합한 자본주의 시대에 모든 ‘것’이 재화로 치환되며 인간과 비인간의 삶의 방식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그리고 그 방식은 지속 가능한가? ‘나’ 혹은 ‘타자’의 살아감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는 이 책은 놀랍게도 버섯(菌), 그중에서도 송이버섯에 관한 이야기다. 애나 칭은 다종 민족지 이론을 토대로 인간-균(菌)의 쌍을 통해, 진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으나 결국 얻은 것은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일 뿐인 지금의 시기를 살아갈 작은 기회를 포착한다.
인본주의(人本主義)는 비인간과 인간을 구분하며 인간에게 더 큰 가치를 두는 사상이다. 인본주의는 ‘인류세’라는 인간에 의해 파괴된 지구 환경을 하나의 지질학적 세대로 나눌 수 있다는 개념을 뒷받침한다. 인간이라는 단일종이 다종의 생물이 살아가는 지구 환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독보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는 개념은 분명 우리에게 기후 위기와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우며 실천적 행동을 이끌지만, 여전히 인간 중심적이다. 인간-비인간의 이분법적 사고가 해체되는 포스트휴머니즘이 대두되며 문화인류학 계에서 다종 민족지 이론이 등장했다. “말 그대로 다수의 생물종이 마주치고, 얽히고, 충돌하며 만들어가는 공동의 삶의 세계”(511)이다. 애나 칭은 해러웨이의 〈반려종 선언〉의 인간-개라는 한 쌍의 다종적 관계의 공진화 개념을 바탕으로 인간-송이버섯, 그리고 수많은 다종적 관계의 얽힘에서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찾는다.
송이버섯은 인간의 손으로 키우지 못하는 작물로 상품으로 양식이 불가능하다. 송이버섯은 “숲의 특정한 나무와 어울려 지내는 땅속 곰팡이의 자실체”(85)로 나무가 자랄 수 있도록 도우며 나무로부터 자라날 탄수화물을 얻으며 상호공생 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손을 타지 않은 숲에서도 자라지 않으며, 인간이 목재 생산을 위해 벌목을 하고 산불을 지르고 난 “폐허에 깃든 확장성”(86)에서 자라나는 작물이다. 이러한 송이버섯의 생태는 “생물의 기본 단위를 단일종이 아닌 다종의 복합체로 이해”(511)해야 한다.
송이버섯 채집인들은 대부분 동남아시아에서 온 난민 혹은 이주민들이거나 자본주의 사회 속 소외된 노동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이다. 안정된 수입이 부재한 노동자나 송이버섯을 채집하는 숲이 고향의 풍경과 비슷해 이곳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는 이주민 들이 송이버섯 채집을 통해 이들은 주변자본주의 영역에서 생산물과 깊게 얽혀 있는 노동을 수행한다. 이러한 주변자본주의 영역의 산물인 송이버섯은 미국 오리건주에서 일본으로 옮겨지며 무역 상품으로서 재화의 일부가 된다. 자유의 트로피와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던 송이버섯은 채집인과의 관계가 단절됨과 동시에 자본주의 내 상품으로 변화하고 이는 대형물류창고에서 비숙련 노동자들에 의해 다시 분류된다.
애나 칭에 따르면 상호 종의 마주침은 오염이며, “오염된 다양성은 근대 지식의 특징이 된 일종의 ‘요약하기’에 저항한다.”(76) 오염으로 형성된 세계-만들기는 패치의 열린 배치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배치안의 여러 생물종은 서로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서로 영향을 끼치게 될지 알지 못한다. 관찰하는 우리도 배치된 생물종 중 하나일 뿐이다. 브라질의 플랜테이션 농장과 같이 오염되지 않은 단일한 확장성은 순수가 아닌 고립이다. 신대륙으로 넘어가서도 다른 종과 거의 교배되지 않은 사탕수수뿐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노예화된 플랜테이션 농장 노동자들 또한 농장 속에 고립되어 있었다. 노동자들은 신대륙에서 단절된 채 해당 나라의 언어도 배우지 못하며 최대한의 노동력을 요구하는 농장 주인 밑에서 착취당했다. 우리는 확장성을 기술의 발전이 이륙한 진보와 결합하여 생각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진보가 원자폭탄을 맞은 폐허를 만들었듯이, 이와 같은 확장성은 “자연에 존재하는 일반적 특성이 아니다.”(81)
요약하기에 저항하는 오염된 다양성이야말로 자연적 특성이며, 인류의 등장 이래로 생태계를 꾸려온 가장 근원적인 특성이 된다. 다양성은 간략하지 않다. 예측하기 어렵고, 불안전하고, 위태롭다. 그러나 우리는 “파괴된 우리 풍경들의 제멋대로 자란 변두리를―자본주의적 규율, 확장성, 그리고 자원을 생산하는 방치된 플랜테이션 대농장의 가장자리를―여전히 탐험할 수 있다.”(497)
물가는 치솟고 노동 안정성은 날이 갈수록 낮아진다. 지난해 오세훈 서울시장이 강력히 도입을 주장하던 필리핀 여성 가사노동자 관련 사업이 해당 가사노동자와 필리핀 정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채 고용 불안정성과 낮은 급여, 근로기준법상 적용되는 휴일 제외 등의 복지 형태로 인하여 협의에 난항을 겪고 있다. 또한 11월 30일 기회발전특구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근로기준법, 최저임금법, 중대재해법 등의 적용을 피해 갈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지역균형투자촉진 특별법안이 국회 상임위를 통과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노동법 치외법권을 형성하는 것이 어떤 인과관계를 통하여 지역발전에 기여하는지 알 수 없다는 의견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자본주의의 폐허를 상상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애나 칭이 제안한 타종과의 교란을 통한 세계-만들기가 이륙한 공유지를 상상한다. 비인간 생물종들과 소외된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이용한 구제 축적이 이루어지는 공간. 그러나 여전히 한국 사회는 단일종 내부의 오염과 교란조차 받아들이기 버거워하는 듯이 보인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산품과 노동에서 끊임없이 배제되다 못해 사회에서도 점차 분리 되어간다. 인간이 인간을 분리하는 사회에서 비인간의 설 자리를 논할 공론장 또한 부재한다. 생태적 이질성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이분법적으로 나뉜 권력관계 속에서 고압적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
불안정한 고용 형태로 계속해서 노동에서 소외되는 이들은 송이버섯을 찾으러 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까? 언제쯤 산책을 하다 송이버섯을 마주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진보와 성장은 여전히 한국을 폐허로 만든다. “문제는 진보가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61) 노동법이 효력을 잃는 지역이 성장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의 앞에 송이버섯은 없다. 폐허만이 남을 뿐이다.
[원문 링크]
아트인사이트, [Opinion] 균-본(菌-本)주의에서 공진화의 가능성을 보다 – 세계 끝의 버섯 [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