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간을 작가로 만드는 최초의 욕망은 무엇일까?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일까, 금전적 성공일까, 자유의 성취일까, 혹은 인정 욕구일까? 작가는 글로 세계를 만든다. 작가와 작품은 분리하여 이해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작가를 아예 배제할 수는 없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지만, 소설에 있는 모든 글자는 온점까지도 작가의 의지대로 쓰인다. 그렇기에 어떤 때에는 작품이 작가의 얼굴을 대신하기도 한다. 만약 작가가 여성이고, 여성이 글 쓰지 못하던 시대에는 더더욱. 이런 시대에서 만약 ‘나’가 여성이고 ‘나’가 글을 쓰고 싶다면, 그리고 ‘나’의 동생들도 글을 쓰고 있다면, 작가로서 ‘나’의 최초의 욕망은 무엇이 될까?
뮤지컬 〈브론테〉는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으로 글쓰기를 선택했던 브론테 자매들의 삶과 죽음을 다루는 작품이다. 《제인 에어》를 쓴 샬럿 브론테, 《폭풍의 언덕》의 에밀리 브론테, 《아그네스 그레이》의 앤 브론테는 어린 시절부터 ‘글 쓰기에 미친 인간들’이었다. 모두 글을 쓰고 출판할 ‘자유’를 원했으나, 각자가 상상한 ‘자유’의 얼굴은 달랐다. 문학계의 인정과 금전적 성공을 얻기 위해 샬럿이 처음 한 행위는 ‘여성-지우기’다. 남성적 이름 ‘벨 형제’를 사용하여 ‘브론테 자매’라는 여성성을 지웠으나 그들의 소설은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계속 글을 써나가자고 다짐하며, 에밀리가 들은 목소리를 시작으로 불타오르던 자매들의 글쓰기는 그들에게 ‘이상한 편지’가 도착하면서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자매들에게 글쓰기란 당시 억압적인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 속 여성이라는 호명 아래 지워진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여성의 이야기는 손쉽게 아마추어의 이미지와 연관된다. 여성은 자기만의 방이 없고, 자신의 이야기를 품은 언어가 없어서 그들의 작품은 손쉽게 어설프고, 전문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여성과 아마추어의 이미지가 이렇게 맞닿아 있는 상황에서, 문학 제도권 내로 편입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까? 성공은 일견 인정과 연관이 된다. 프로와 아마추어를 구분하는 선을 금전적 보상 의 유무로 보았을 때, 샬럿의 ‘돈을 벌고 싶다’라는 욕구는 남성 중심적 문학 제도권 내의 인정을 욕망한다는 점과 같다. 여성 작가가 제도권에 편입하기 위한 1차 조건은 여성임을 지우는 것이었고, 2차 조건은 ‘제도권 문법에 걸맞은 이야기를 쓰기’다. 그리고 샬럿은 그 조건을 에밀리에게 강요하기 시작하며 여성적 아마추어 공동체는 와해의 조짐을 보인다.
“엘리스 벨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 평론지에 이렇게 실리고 싶어?
(...)
“이 세계를 통제하려고 노력은 했어?”
뮤지컬 <브론테> 中
샬럿은 써야 하는 대로 썼을 뿐이라는 에밀리에게 ‘우리의 소설’이라는 이유로 그의 세계를 통제할 것을 요구한다. 이때 샬럿의 통제 욕구는 남성 중심적 제도권이 여성에게 가하는 억압과 유사하다. 자유를 위해 억압을 내재화한 샬럿에게 에밀리의 소설은 악몽을 꾸게 만들만 괴상한 소설이 될 뿐이다. 글쓰기로 ‘나’라는 자아를 확립한 에밀리의 작가상을 ‘괴상한/이상한 것’으로 타자화하며 샬럿은 ‘우리’라는 새로운 억압적 공동체 안으로 끌어들인다. 세상의 인정을 통해 자유를 획득하고자 하던 샬럿과 고유한 작가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자유를 획득하려는 에밀리는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결국 샬럿은 집을 떠난다. 그렇게 아마추어 공동체는 외부 시선에 의해 붕괴한다.
‘우리’라는 공동체가 사라질 때, 떠난 이와 남겨진 이들에게는 무엇이 남을까? 이 극에서는 떠난 이가 겪는 상실과, 남겨진 이들이 느끼는 단절을 보여준다. 샬럿은 떠나 작가로 성공했으나 자매들은 세상을 떠났고, 에밀리와 앤은 떠난 샬럿의 성공을 들으며 기뻐하지만, 에밀리의 건강은 나빠지고, 앤은 자신의 이름이 빠진 자신의 책을 보기도 한다. 떠난 이와 남겨진 이들은, 서로가 서로의 결핍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공동체의 회복은 익숙한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황급히 돌아온 샬럿이 자기 내부의 남성적 시선을 ‘악역’으로 지칭하고, 후회하며 자기 잘못을 지적하는 ‘이상한 편지’를 쓰고 나서야, 두 자매는 샬럿의 옆에 나타난다. 죄를 고하고 뉘우친다는 기독교적 회개 의식으로 자매들의 공동체는 회복된다. ‘우리’의 공동체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황량한
때론 모질고 슬프기만 한 삶이었으나
우리는 우리의 이름으로 내내 치열했고
존재했으므로 이미 충분했다.
또 어느 곳 나와 닮은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가 닿기를 바라며”
뮤지컬 <브론테> 中
공동체의 회복, 고해성사로 해소되는 갈등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작가가 됨으로써 자유를 원하는 자매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누가 옳고 그른가, 누구의 잘못인가를 가늠하는 일은 의미가 없다. 죄가 사하여진 공동체 속에서, 이들의 갈등은 작가로서의 고뇌와 열망을 나타내는 증거로 작용한다.
작가로서 ‘나’의 최초의 욕망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은 “이 이야기가 닿기를 바라며” 모여든 관객들에게 있다. 그들이 치열함을 통해 삶의 당위를 긍정하였을 때,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고민하는 순간에 우리는 작가로서 ‘나’의 최초의 욕망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쓰게 만드는 욕구는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쓸 때 우리의 옆에 있는 이들은 누구이며 누구여야 할까? 앞으로 글을 쓰면서 우리가 회복해 낼 공동체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이어지는 질문들이 남는다.
[원문 링크]
아트인사이트, [Review] 그렇게 여자들은 작가가 된다 - 뮤지컬 '브론테' [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