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유 Jun 20. 2024

일인칭 글쓰기로서의 에세이

1

우리가 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잦아졌다. ‘나’라는 일인칭 대명사를 사용하는 글을 쓰면서 언제나 ‘나’를 지워내고 싶어진다. 나는 ‘나’라고 쓰는 동시에 텍스트 안에서 어떠한 견해를 밝힐 것을 요구받는데 이는 소설 아닌 에세이의 형식에서 더욱 커진다. 허구라는 하나의 벽이 존재하는 까닭에 어쩔 수 없이 객관성을 기반으로 조형되는 소설의 ‘나’와 에세이 장르의 화자인 ‘나’는 전혀 다르다. 후자의 ‘나’는 텍스트 속의 기준이자 규칙, 선이자 악, 호이자 불호이며 옮음이자 그름이다. ‘나’는 나의 텍스트를 지배하는 최소한의, 그러나 최대한, 그러므로 유일한 전제 규칙이다.

 

우리에서 벗어나 ‘나’를 호명하면서 이어지는 글쓰기는 타인에 의하여 대상화되지 않겠다는 정치 사회적 주체성을 띠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모든 의무를 포기하기도 한다. ‘나는 나일 뿐.’(누구도 대신 할 수 없어) 그러나 ‘나는 나일 뿐’이라는 주체성을 포기한 채 개인화되길 원하는 열망조차 해체주의적 관점으로 읽힌다는 점에서, ‘나’라는 화자는 언제나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2

‘나’는 취약하다. 긍정적인 목적성을 가지는 공론장이 부재함에 따라, ‘나’는 손쉽게 공격 대상이 된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보편주의에 입각한 논리(반지성 시대에서는 이러한 변명이 통하지 않을 수 있다)이거나 나는 ‘너’도 이해하고 ‘그’도 이해한다는 박쥐 같은 결론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일인칭 글쓰기라는, 내가 나의 이야기를 하는 당사자성의 힘을 얻는다. ‘나’는 취약하면서 동시에 막강하다. ‘나’는 아무도 대변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우리를 대변한다. ‘나’의 재현은 폭력적이면서 평화롭다. 무궁무진한 활용 방식을 적용할 수 있는 탓에, ‘나’의 일인칭 글쓰기는 두렵고 무섭다.

 

 

 

3

모두 에세이에 대해 말한다. ‘00도 괜찮아’ 유의 힐링 에세이의 자가복제에 대해서도 말하고, 몽테뉴나 울프, 손택, 르 귄, 애트우드의 에세이에 대해서도 말한다. 에세이는 ‘나’의 글쓰기이기에 복제되는 순간 ‘나’를 잃는다. 나는 아주 손쉽게 우리가 되고,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우리들은 우리들이고, 모두이고, 모두가 끄덕이고, 모두가 끄덕이게 됨으로써 ‘나’라는 자아정체성은 소멸한다. ‘나’를 대신하는 ‘우리/대중/사회/세계’의 말은 굳이 일인칭 에세이라는 형식이 필요 없다.

 

‘나’임을 이해하고 이끄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에세이는 아무리 에세이‘들’이 되어도 절대 복제일 수 없으며, ‘-들’이라는 복수형이 아닌 단수로 존재하는 ‘나’들의 합이 된다.

 

 

 

4

“당사자-일인칭”[1] 글쓰기는 자기중심적 특성을 기반으로 하며, 일인칭 대명사를 주어로 삼는 “에세이 장르가 가장 강력한 진실성을 확보한(할 수 있는) 장르로서 각광받고 있다.”[2]

 

 

 

5

일인칭 주어 ‘나’의 진실성 :

“나는 글을 쓰려고 집에서 나왔습니다. 더운 날씨에 반소매 티셔츠를 입었습니다. 카페에 나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다 마셨습니다. 아메리카노를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피곤할 때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건 큰 효과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6

글쓰기에서 ‘나’와 ‘우리’의 운용은 필수적으로 ‘그/그들’을 불러온다. ‘우리’는 ‘나’의 적절한 대체어처럼 보이지만, ‘우리’에는 의도와 계획이 있다. ‘우리’의 대표성은 탈각될 수 없다. ‘나’는 한 번의 시도, 새로운 오솔길이 되지만 ‘우리’는 다수의 시도, 그러므로 포장된 도로이자, 모두 그 길로 걸어가라는 이정표다. ‘우리’의 호명은 시기적절하게 활용되어야 한다. ‘나’의 말이었지만, 사실은 ‘너와 나’, 그리고 읽는 ‘너’들, 즉 ‘우리’의 이야기라는 지점을 확실히 하고 싶은 곳에서 더욱 강조된다.

 

 

 

7

《사이보그가 되다》를 읽고.

 

장애를 손상이나 결함으로 바라보는 일은 폭력적이며, 장애는 차이의 담론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저자들의 주장에 비장애인인 그는 이렇게 물었다. “나 같으면 치료하고 싶을 거 같은데, 다른 장애인들도 다 동의해요?” 이때 그가 사용하는 ‘나’의 짙은 폭력성에 할 말을 잃는다. 새로운 장애 담론 ‘제안’에 다른 당사자들의 ‘모든’ 동의 여부를 묻는다는 사실이 무례하게 느껴진다. 사회적 소수자들의 ‘모든 동의’라는 것이 얼마나 허황한 말인지,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장애인이라면 꼭 한 가지의 주장만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단수의 ‘장애인’만이 사회에 존재하는 것처럼. 나는 그와 비장애인이라는 ‘우리’로 묶이고 싶지 않다. 이와 같이 ‘우리’로 묶이지 않을 소수자들의 자유 같은 건 그는 고려하지 않았다.

 

 

 

8

‘나’를 주어로 하는 문장은 언제나 사실-아님과 픽션의 중간에 있다. 그러므로 에세이는 진실성을 담보할 수 없다. 자기를 중심에 둔 세계 기술은 언제나 왜곡된다. ‘아메리카노를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얼그레이나 페퍼민트도 즐겨 마십니다)

 

 

 

9

에세이는 독백이다. 독백하는 ‘나’에게 ‘너’는 완결된, 꽉 닫힌, 변치 않는, 그러므로 ‘나’가 분석할 대상이다. 그렇게 독백하는 ‘나’와 타인의 관계란 타인의 유동성을 전제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나’는 ‘나’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나을까? ‘너’는 ‘나’의 의도대로 편집된다. ‘나’의 독백에서 ‘너’가 ‘또 다른 나’로 존재하기란 불가하다.

 

SNS에 올라오는 ‘무례한 친구와 손절한 썰’은 모두 ‘나’가 작성하고 편집하고 발행한다. ‘썰 안에 인물’이 ‘나’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나’인 글을 발행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나’는 절대 타인을 포용하지 않는다. 같은 에피소드에서 두 개의 ‘나’는 충돌한다. 그것은 ‘우리’가 되지 않는다.

 

 

 

10

브라이언 딜런 : “에세이란 ‘평생을 작가로 살면서 도무지 한 가지 과제를 위해선 살지 못하는 데 대한 핑계’는 아닐까?”[3]

금정연 : “더욱이 모든 이야기가 거짓말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은 거짓말쟁이이기도 한데, 결국 모든 인간은 이야기꾼이다.”[4]

리베카 솔닛 :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모두에게 하는 행위이다.”[5]

‘나’라는 시점의 에세이는 “세계를 향한 입장(stance)의 선택”[6]이다. 핑계를 대기로 하면 핑계가 되고, 이야기를 하고자 하면 이야기가, 거짓말쟁이가 되고자 하면 거짓말쟁이가 된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말하고 마는 그 역설이 ‘나’의 에세이다.

 

‘나’는 나 자신이면서 나 자신이 아니다. 이건 언제나 거짓이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거짓말쟁이다. ‘나’의 안팎에서 우리는 언제나 진실성을 찾으려 하지만, ‘나’는 텍스트 안에서만 존재하며 문장을 끝맺는 순간 사라진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나’를 계속 불러내 묻는다. ‘나’는 진실될 수 있나? ‘나’는 정의로울 수 있나? ‘나’는 ‘우리’가 될 수 있나?

 


 

참고문헌

[1] 소영현, <일인칭 비평 시대 : 발견하는, 비평하는>, 《오늘의 문예비평》2023 가을호(129), p.55.

[2] 위와 같은 글. 같은 쪽.

[3] 브라이언 딜런, 《에세이즘》, 카라칼, 2023, p.56.

[4] 금정연, 《담배와 영화》, 시간의흐름, 2020, p.75.

[5]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반비, 2016, p.100.

[6] 정주아, <일인칭 글쓰기 시대의 소설>, 《창작과비평》 2021년 여름호, p.56.



[원문 링크]

아트인사이트, [에세이] 일인칭 글쓰기로서의 에세이

매거진의 이전글 베끼고 무시하고 인용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