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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 May 24. 2024

우아한 전쟁의 시작

준비하지 못한 장애

8년전 중국으로 가기 전부터 다리가 자주 뭉치고 저렸다. 서있는 직업이다 보니 발목이 자주 아파 MRI를 찍어보았다. 아킬레스건에 염증이 있다고 의사 선생님이 혹시 운동을 심하게 하느냐고 물어보았다. 발목에 과부하가 걸리는 운동, 특히  등산은 하지 말라고 하였다. 중국행을 준비하며 퇴근 후 집에 와서도 계속 서서 해외이사 준비를 했다. 발목, 무릎, 허리 안 아픈 곳이 없었지만 준비하느라 병원을 갈 시간도 쉴 겨를도 없었다. 먼저 입국한 남편이 중국에는 발마사지 하는 곳도 많고 중의학이 발달되어 있으니 와서 치료받으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케리어 4개, 이민가방 2개, 그때는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들과 중국 베이징에 입성을 했다. 베이징에 도착한 다음날 남편과 발마사지 하는 곳에 같이 가서 6년간 우리의 육신을 안마해 주는 곳과 인연을 맺었다.

중국에서 나는 기동력이 없는 뚜벅이 생활을 했던지라 넓은 땅을 더 많이 걸어야 했고 통증이 심해졌다.

그리하여 수소문해 중의원을 찾아갔다. 한국에서 양의학을 공부하신 한국분으로 중국에 가서 중의학을 공부해 중의사 자격증까지 따신 수염이 있는 '털보선생님'은  중국에 있는 동안 나를 비롯해 우리 집의 주치의가 되어주었다.

침치료도 하고 굳어진 근육을 푸는 물리치료도 받았다. 그렇게 지내다 어느 날 털보선생님이 나보고 다음번 한국행 때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가서 정밀 진단을 받아보라고 하셨다. 나의 상태가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 같다고..


서울에 있는 대학 병원에 가려면 2차 병원의 소견서와 검사결과가 있어야 했다. 한국에 가자마자 MRI를 찍었던 병원에서 소견서를 받아 삼성서울병원 뇌신경과로 갔다. 교수님이 소견서와 나의 상태를 보더니 추가 검사를 하라고 했고 2주 뒤 다시 올라가 진단을 받았다.

진단명을 듣고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이때까지 잘 살았는데 40이 되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병에 걸린다는 말인가.

완치치료약이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한다.

뇌의 중추신경이 하반신 근육의 이완을 제어하지 못해 계속 수축되고 있으니 근육이완제를 먹으라 한다. 6개월치의 약을 받아왔고 나는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와 털보선생님께 서울에서의 진료결과와 진단명과 처방받은 약을 알려드렸다.

선생님은 어느 정도 나의 병을 짐작하셨다한다.

그 뒤부터 털보선생님이 나에게 준 숙제는 매일 근육을 푸는 스트레칭, 운동 그리고 상태를 매일 기록하는 것이었다.


내려가는 턱이 있는 줄 모르고 발을 헛디뎌 넘어진 일,

아이와 눈길을 걷다 미끄러진 일,

약은 얼마나 먹고 증상은 어떠했는지,

매일 적었다.


중국 베이징 주재기간인 6년의 세월이 흐르고 귀국 준비를 하였다.

코로나가 종식되지 않은 시기에 귀국준비도 큰 일이었지만 나에게는 다른 고민이 있었다.

중국으로 떠나기전 나는 평범한 교사생활을 하였고 남편의 해외 발령으로 휴직을 하고 중국 생활을 하였다.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아이들은 자랐다. 그리고 나는 희귀난치병 진단을 받았고 몸의 상황이 예전 같지 않았다.

귀국하면 휴직 사유가 끝나 복직을 해야하는데 예전처럼 학교 생활을 해나갈 자신이 없었다.

털보한의원에 갔을 때 그런 고민을 얘기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털보선생님은 펄쩍 뛰면서 꼭 복직을 해 교사생활을 하라고 하셨다. 학교에 엘리베이터도 있고 불편한 상황들은 도움을 요청해 해나가면 될거라고 조언해 주셨다. 교사직을 그만두고 집에 있으면 우울증이 생겨 더 힘들거라고 하셨다.

그 조언에 힘입어 귀국과 함께 복직 준비도 하였다. 6년만에 돌아간 직장은 감사하기도 했지만 첫발령받은 신규교사처럼 모든 것이 새로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걱정했던대로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학교의 관리자분들도 난처하셨을 것이다. 휴직후 6년만에 복직한 교사가 보니 몸이 불편해 걷는 것이 힘들어 보인다. 여교감선생님께서 나는 조용히 부르셨다.

"몸이 이렇게 안좋은 줄 몰랐네요. 병이 있어 그렇다면 장애등급 신청을 해보는 것은 어떠한지..

그러한 증명서가 있으면 우리가 제도적으로 선생님을 더 떳떳하게 도와줄 수 있어요."

그리하여 나는 다음번 삼성서울병원 진료일에 올라갈 때 담당 교수님께 장애인신청을 해보려 한다고 말씀드리니 서류를 준비해 주셨다. 나와 같은 질병인 분들은 대부분 이미 거쳐간 수순이었다.

장애인신청서류를 받아 내가 살고있는 지역의 행정복지센터에 가서 장애등급신청을 하였고 두 달 후 결과가 나왔다. '지체장애 - 심하지 않은 장애' 등급을 받았고, 장애인 주차구역 주차가능 스티커를 받았다. 다행이 나는 운전이 가능해 노란색 스티커가 발부되었다.


이렇게 나는 일반인과 다르다는 증서인 장애인복지카드를 받았고, 장애인 주차가능 스티커도 발급받았다.

몸이 불편하고 아팠지만 해외에 있는 동안 내가 장애인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귀국해 조직에 들어가보니 이러한 신체적 상황으로 직장생활을 하려면 나는 일반인과 다르다는 증서가 필요했다. 요즘 우리 나라의 장애인 선별 기준은 갈수록 엄격하고 까다로워지고 있다 한다.

몸이 아프거나 불편해 일상 생활에 지장이 있어 국가가 배려하고 도와주어야 하는 이들이 장애인이다.

나는 이렇게 귀국과 함께 준비되지 못한 장애인 생활을 시작하였다.


적다 보니 중국생활 중의 주치의 털보선생님이 생각이 난다. 베이징에서 만난 의사 선생님의 도움으로 병을 진단받았다.

지방의 병원에서는 이름도 알기 힘든 병이었다.

일지를 쓰며 오늘의 우아한 전쟁을 마무리해 본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바쁘게 우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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