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험생활을 끝내게 해 준 두 가지
간절함 속에 마주한 우연
나는 안타깝게도 머리가 나쁘다. 그래서 늘 열심히 공부했지만 성적은 중간 이상을 가지 못했다. 나의 성과는 언제나 노력을 배신했음에도 머리가 나빠 머리가 나쁜지 몰랐다.
예를 들면, 포인트를 잡지 못한다.
윤동주 시인은.... '별 헤는 밤', '서시', '쉽게 쓰인 시'를 지었고, 후쿠오카에 투옥되어 28세에 타계했다'라는 긴 문단 중 '후쿠오카', '28세 작고'를 외우고 너무 젊은 나이에 떠난 천재를 한동안 기리며 시간을 소비했다.
특히 제일 어려운 과목. 과학과 수학이 짬뽕된 문제를 만나면 뇌는 버퍼링만 돌다 파워오프 되기 일쑤였다.
한 번은 모의고사 문제를 같이 풀어보는 시간. 선생님은 나에게 다음의 문제를 풀라며 지목했다.
'전깃줄에 흐르는 전류량을 계산해 참새에게 가해질 볼트 세기'를 풀라는 문제였다. 1번. 10 볼트 /2번. 5 볼트 /3번....
나는 당당하게 "5번. 정답 없음.입니다."라고 했다.
담임은 왜냐고 물었다.
"참새는 전류에 감전되지 않아요. 제가 참새가 멀쩡하게 전깃줄에 앉아있는 게 봤거든요"
순간 반 아이들이 "꺄르르르" 웃었다.
나는 왜 웃는지 몰랐다. 그저 수치스러웠다. 웃기려고 농담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것은 농담이 아니라 나의 무식함에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중에 친구들은 농담인 줄 알았다고 하며. 무식해서 웃는 걸로 오해하게 해 미안하다고 진지하게 사과했다.
진지한 태도가 이상하게 더 기분 나빠 그냥 농담으로 알게 놔둘 것을 후회했다.
이렇게 반에서 15등(기억에 최고 기록) 이상 해 본 적이 없는 내가 공무원 시험에 붙은 이야기다.
나쁜 머리와 빈곤으로 나는 타 수험생들보다 더 열악하고 비참한 생활을 했다. 아무리 가족과 사는 집이지만 한 푼의 용돈 없이 사람은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
엄마는 '싸는 것도 다 돈이여'라며 변기 물조차 내리는 것을 아까워했다. 사람은 숨만 쉬어도 돈이 든다.
독서실 총무로 월 30만 원을 받고 아침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했다. 작은 창구가 있는 총무 자리에서 책과 온라인 무료 강의를 찾아가며 공부를 했다.
공부에 집중하는 와중에도 독서실 등록을 하러 오는 친구가 있으면 독서실 투어를 시켜줘야 했고 '휴지 없다'. '정수기에 물 떨어졌다' 등등 같은 예민한 수험생들의 요구와 독서실의 결핍을 틈틈이 빠르게 채워줘야 했다.
이런 생활을 2년쯤 지속하던 어느 날. 독서실 휴무날이었다. 집에서 공부가 잘되지 않아 도서관을 가던 중 교복을 입은 남학생 10대 3명이 나는 불러 세우더니 "누나. 잠시만요" 하며 후미진 골목 쪽으로 데려갔다.
'돈이라도 뺏으려나. 보통 불량 청소년들은 어린 후배들 돈을 뺏던데. 아무리 그래도 20대 중반의 여자에게 돈을 뺏겠나. 그리고 나 돈 천 원 있는데... '라고 생각하던 차에
그들이 나에게 돈을 주었다. 무려 '오천 원'!
"누나, 미안한데요. 담배 좀 사다 줘요"
잔뜩 겁먹었던 나는 그제야 안심하며 쫄보에서 청소년을 선도하는 어른으로 돌변했다.
"학생이 담배를 피우면 되나! 어른으로서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야"라고 하니
"저희 담배 못 사가면 선배들한테 정말 맞아 죽어요"
순간, 이들이 걱정되어 조금 망설여졌지만 그래도 담배를 사다 주는 건 아니다 싶어 호기롭게 말했다.
" 그 선배들 누구야. 혼내 줄게 데려와. 문제를 이런 식으로 해결하면 너희는 끊임없이 끌려다니게 된다고!"
라고 눈에 힘을 주고 당장이라도 이 어린양들을 구해줄 것처럼 정의롭게 말했으나,
"아. C발! 졸리 짜증 나네. 그냥 사 오라고!"라는 말에
아차.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다시 보니 이들의 얼굴도 순진무구 착해 보이는 피해자 표정에서 세상 험악한 인상으로 돌변해 있었다. 그리고 상당히 무서워졌다.
마음속 소리. 그 한 가지만이 안전하다고 확신했다.
'빨리 도망쳐!'
나는 나를 둘러싼 한 명의 어깨를 팍! 치고 다다다다 달려 도서관으로 숨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의 일이다.
이번에도 도서관에 걸어가는 데 누가 내 뒤통수를 세게 팍! 치고 깔깔 대며 달려가는 것이다.
지구 끝까지 달려가 잡겠노라 힘껏 달렸지만 10대 청소년이었던 두 아이는 잡을 수 없었다. 그 아이들이 이전에 내가 만난 그 아이들인지 모르겠다. 추측만 할 뿐 증거는 없다.
억울하고 비참한 이 찌질이 같은 상황. 주체할 수 없는 눈물로 번져진 거울 속 나를 보니, 그렇게 추레할 수 없었다. 펑퍼짐하고 바래져 무릎 튀어나온 낡은 운동복 바지에 지나치게 큰 티. 헝클어진 머리와 피곤에 절여진 얼굴은 누구에게든 '만만한. 쉬운.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 같은 부류. 부적응자. 부적합자. 은둔형 외톨이. 변두리의 사람'으로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이 외로운 수험생의 길 끝이 합격이 아니라면 나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해 6개월 후에 보는 시험을 마지막으로 사활을 걸기로 했다. 총무를 그만두었다. 40분 거리의 도서관과 집을 걸어 다녔고 200원짜리 초토 파이 하나와 250원짜리 자판기 커피 한잔으로 끼니를 때웠다. 자려고 눕는 시간 빼고는 무조건 책을 봤다. 화장실에 갈 때도 이동할 때도 책을 봤다.
그리고 시험 당일. 시험장에 입장하여 보니 한 교실에 30명이 있었고 경쟁률은 32대 1이었다. 이 교실 가운데 한 명만 붙는다. 나는 자신이 없어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교회를 다니던 날로 돌아가 예수님, 하나님을 소환해 가며 간절히 기도했다. 그냥 합격하게 해달라고 하면 안 들어줄 것 같았다. 뭘 달라는 기도에 응답받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 교실에서 제일 간절하고 불쌍한 딱 한 사람. 그게 저입니다. 저보다 더 간절하고 급박한 사람이 있다면 저를 기꺼이 떨어뜨리세요'라고 기도했다.
나는 기도에 응답받았다.
그렇게 나의 합격 비결은 간절함이었다. 나는 누군가 용돈 월 40만 원씩 받으며 55만 원짜리 노량진 고시원에서 생활하고 백만 원짜리 종합학원을 다닌다는 소리를 들으면 '합격하기 어렵겠다'라고 생각한다.
더 신기한 것은 의도한 것이 아니었으나 이후 나는 비행 청소년들을 진단하고 분류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비행 청소년이 나를 답도 없는 긴 수험생활을 끝내게 해 주었는데 그 끝에 나는 다시 비행 청소년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와 그들의 이야기가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