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을 앞두고 돌아보는 인생 여행기
스물아홉 내 인생 돌이켜보면 '여행'이라는 키워드를 빼놓을 수 없다. 2014년, 캘리포니아의 부촌인 어바인Irvine에 간 것을 기점으로 일본,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스코틀랜드, 몰타, 태국, 인도네시아까지 많은 나라를 돌아다녔다.
어릴 때 1990년 작 <귀여운 여인>을 보고 미국에 대한 환상을 키웠다. 해당 영화는 세기의 미남이었던 리처드 기어가 유능한 사업가로 등장해 매춘부 역할의 줄리아 로버츠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이다.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은 자극적인 서사보다 여자 주인공이 선보인 짜릿한 패션이었다. 마치 덤불처럼 얽힌 머리에 옆구리를 훤히 드러낸 탱크톱을 입은 그녀 모습에 충격받았다. 게다가 가방을 어깨에 대강 걸친 채 무릎 덮는 부츠를 신고 휘적휘적 고급 부띠끄에 들어가 "이건 얼마예요?" 가격 묻는 모습이 엉뚱하면서도 사랑스러웠다. 미국에서는 저런 언니들이 거리를 활보하며 내키는 대로 사랑에 빠지는 걸까? 스무 살을 갓 넘겼을 무렵 미용실에서 흑인처럼 파마해 달라고 한 것도 줄리아 로버츠의 영향일 테다. 서른 앞둔 지금도 무릎 나온 바지 입고 백화점 2층 휘휘 돌며 감탄하기를 즐긴다.
미국에 간 것은 대학에서 주최한 문화 교류 프로그램의 선발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남자 친구가 공항까지 바래다줬는데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째려봤던 또 다른 선발자이자 언니들의 눈빛이 선연하다. 해외를 자주 다니는 사람들은 각국 공항마다 특별한 냄새가 있음을 안다. 미국 공항에서는 세제를 잔뜩 넣은 빨래를 햇볕에 말릴 때의 냄새가 났다. 인상적이었던 또 다른 공항의 냄새는 터키였는데 통후추 수십 톤을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묵힌 냄새가 났다. 미국에 머무는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참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언니들 중 마음 맞는 사람 몇과 승합차 빌려 라스베이거스에 갔을 때가 생각난다. 도로 옆 사막과 선인장보며 미대륙의 광활함에 감탄하던 중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야경이 눈앞에 바다처럼 펼쳐졌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무대 장막이 걷히고 한껏 치장한 배우들이 등장하는 듯한 순간이었다.
미국에서 만났던 친구들의 근황을 종종 본다. 더는 과거의 영광을 찾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페이스북이지만 간략하게나마 소식을 알 수 있어 감사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파일럿, 승무원, 게스트하우스 대표, 요리사 등 각양각색 잘 살고 있는 듯하다. 어릴 때부터 일상을 손으로 빼곡히 적어 기록했던 내겐 스무 권이 넘는 일기장이 있었다. 하지만 몇 년 전, 별안간 천방지축으로 지냈던 과거를 후회하며 다 태워버렸다. 일기장에는 여행하며 만난 누군가를 좋아하게 돼 상사병 앓듯 적었던 글도 있는데 아쉽다. 그때의 절절한 심정을 인생 어느 시점에 다시 느낄 수 있을까. 내가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은 아직도 내가 사소한 일에 마음 졸이며 글 쓰며 지낸다는 사실을 알까.
다행히 네이버 블로그에 각 나라를 여행할 때마다 남겨둔 글이 있어 브런치에도 몇 편 소개하려 한다.
여행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