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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은별 Feb 12. 2022

늠름하고 멀쩡한 인간으로 사는 것

대기업 입사에 실패했다 

대기업 입사는 물거품이 됐다. 서류 합격 이후 과제를 내 면접 대상자를 한 번 더 거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과제는 음악과 영화, 드라마를 포함한 여러 개의 보기 중 작품 두 개를 골라 서평 쓰는 것이었는데 학부 재학 중 늘 해왔던 것이라 은근한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사측 회신이 늦어 담당자에게 전화하자 “지원자가 너무 많아 발표가 지연되고 있다”는 차가운 어투에서 결과를 점칠 수 있었다. 대학 다니며 무척 가고 싶었던 뉴욕 인턴십 선발 과정에서 탈락한 기억이 난다. 소식 들은 나는 가로수가 빼곡했던 강남의 대로변을 걷다 우뚝 서 울었다.



한시도 가만 있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곧장 다른 회사에 취직했다. 입사를 앞두고 집에 박혀 영화를 몰아 봤다. 그중 기억에 남는 것은 단연 박찬욱이다. 복수극 시리즈로 불리는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중 두 번째 것부터 봤다.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은 스무 살 무렵 만났던 영화 중독자 남자친구 때문이었다. 그때는 각 사건의 인과를 명확히 이해할 수 없어 충격적인 반전 외 마음에 와닿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며칠 전 다시 본 이 영화에 손뼉을 칠 수밖에 없었다. 연극적인 장면 전환이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 내던져 연기에 몰입한 배우 보며 심장이 뛰었다. ‘복수’라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연출자가 곳곳 치밀하게 심어놓은 장치에 전율했다.



하루가 지나지 않아 같은 영화를 또 봤다. 나는 <올드보이>의 세계관에 침몰한 사람처럼 하루를 보내고 있다. 종일 삽입곡을 틀어놓고 비릿한 감상에 침잠한 상태로 지낸다. 어릴 적 나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준에 맞지 않는 행동을 더러 했다. 지금이라면 이런 행동을 창의성으로 해석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혹은 내면에 구멍이 있는 아이라는 사실을 누군가 알아차리고 손을 건넸을지도. 그러나 그때는 오은영 박사도 등장하지 않았을 때였다. <올드보이>에 일찍이 빠졌다면 이런 작품 한 편을 쓰겠다는 각오로 살았을 듯하다.

겉보기에 늠름하고 멀쩡한 인간으로 사는 것과, 예술에 대한 일념으로 한 작품을 절망적으로 그러나 열정적으로 써 내려가는 것 중 삶의 의미와 가까운 것은 무엇일까.



올드보이 사운드트랙이 한 바퀴를 다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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