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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난감공장 Jan 26. 2023

말을 더듬는 남편

< 서른다섯 살, 2022. 8. 29. 화요일 >

< 서른다섯 살, 2022. 8. 29. 화요일 >

#부부 #대화 #약점

# 배우자가 나를 잘 모른다는 생각에 야속한 마음이 들 때



  학교 방학이 끝나갈 무렵, 긴 휴식에 너무도 자유로워진 몸을 보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동네라도 한 바퀴 돌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헤어밴드를 꺼냈다. 운동화를 신으며 아내와 아이에게 달리기를 하고 오겠다고 말 한 뒤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그렇게 한참을 땡볕에서 뛰고 집으로 돌아왔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들어오는 아빠를 보고 아이가 한 마디 했다. "아빠 뭐 하다 이렇게 늦게 왔어요. 어서 샤워를 하세요, 실시!" 요새 보는 TV 만화에서 나오는 말투인 줄 알았는데 가만 보니 군인 아빠의 말투였다. 아직 어린아이는 아빠의 직업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난 삼아 아이에게 "장난감을 치우자, 실시!", "밥을 맛있게 먹어보자, 실시!" 했던 말투가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그새 아빠에게 샤워를 명령할 수 있게 되다니.



  잠시 웃다가 샤워를 하러 가려는데, 뜬금없이 아내가 한 소리를 한다. 아이가 아빠의 말을 곧잘 따라 하니, 우리도 말하는 데 조금 더 신경 써야 할 거라고. 아내의 말이 조금은 의아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평소 가벼운 일에도 "조심해", "위험해"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다급하게 말하면 아이가 놀라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아내의 뜻밖의 지적은 나를 창피하게 만들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그건 내가 말을 더듬기 때문이야!"라고 소리치고 말았다. 벌게진 웃통을 그대로 드러낸 채로.






  사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말을 더듬었다. 사람들에게 말을 하려면 생각한 말이 잘 나오지 않아 대화의 공백이 생기기가 다반사였다. 그래서 오해가 생기는 경우도 많았다. 대화 중 내가 말을 할 차례에서 소리는 내지 않고 입만 벙긋거리고 있으니 그럴만했다. 특히 큰 소리로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그 단어가 한 번에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터득한 것이 여러 번 말하는 것이었다. 만약 운전을 하다 누군가 갑자기 끼어들어 위험한 상황이 생긴다면, "조심해!" 하는 것이 아니라 "조심해, 조심해, 조심해, 조심해!" 하는 식이다. 남들은 당연히 이 말투를 호들갑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떻게든 말을 해내야 한다는 말 더듬는 사람의 노력이었다.



  아내가 운전을 막 시작했을 때, 이 방법은 갈등을 만들었다. 흔히 운전을 가족에게 배우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의욕이 앞서서인지 출발을 할 때부터 싸우기 시작해 집으로 돌아올 때는 서로 거의 녹초가 되어 있다. 그런데 다시 말하지만 나는 말을 더듬는 사람이다. 처음 운전대를 잡은 아내의 옆자리에 타서 같이 긴장을 했고, 주변 차들은 초보 운전을 가만히 놔두질 않았다. 한 차가 갑자기 우리 차 쪽으로 급하게 끼어들었을 때 나는 소리쳤다. "위, 위험해, 위험해.... 위험해!!" 결국 혼이 빠진 아내는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왔고, 우리는 그날 저녁까지 아무런 대화를 하지 않았다.






  말 더듬는 남편과 아내는 그렇게 7년을 같이 살았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나는 내가 말을 더듬는 사람이란 말을 꺼내본 적이 없다. 스스로에게는 약점이었고,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부부라면, 당연히 상대방의 부족한 부분을 알고 배려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웃통을 벗고 "나 말 더듬는 사람이야!"를 외치던 그 순간 깨져버리고 말았다. 



  방 안에 틀어박혀 땀이 다 식어갈 때 즘, 곰곰이 생각할수록 아내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아이에게 큰 소리를 내지 말자는 좋은 뜻으로 꺼낸 얘기였다. 그 순간 '믿었던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하며 발끈한 건 나였다. 사실,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당연히 알아차려 줄 것이라고, 그리고 배려까지 해줘야 한다는 생각은 과하다. 거기에 부부라는 관계의 프레임까지 덮어 씌워 오해를 만들어 낸다. '배우자가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어!' 하는데, 나 스스로도 잘 모르고 사는 수가 다반사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남이라고 날 알겠는가.



  결혼 생활 동안을 돌이켜보면, 내 약점을 먼저 꺼내 놓을 기회가 많이 있었다. 다음 날 있을 브리핑 준비를 하며 밤을 새우고 있을 때, 쉬엄쉬엄 하라는 아내의 말에 '말을 더듬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 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아내와 함께 운전 연습을 나갔던 날, 다투고 나서 각자 방에 들어가기 전에 '많이 놀랬지?' 하며 내 사정을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아내가 내 마음을 잘 몰라줄 때, 특히 약점을 스스로 입 밖으로 꺼내야 할 때는 여전히 야속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묵혀둘 필요가 없는 것 같다. 서로 30년 간 다르게 살아오던 사람들이 만나 같이 살고 있고, 일도 하고, 아이도 키우다 보면 상대에게 잠시 소홀해질 수도 있다. 만약 내가 말을 더듬는다는 사실을 꺼내지 않았다면, 아내는 '내 남편은 말을 할 때 뭔가 이상한데'라는 생각을 계속하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환갑 생일날 말을 더듬는 나에게 아내가 "여보 긴장하지 말고 이야기해"라고 하면 나는 "나 말 더듬는 사람이잖아! 그걸 30년이 되도록 몰랐어?" 하고 발끈할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차라리 지금이라도 말을 꺼내게 되어 다행이다. 또 무슨 이야기를,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꺼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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