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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eng Oct 24. 2022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10. 공백 속으로




나는 매일같이 달린다. 저녁 약속이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거르는 법이 없다. 나는 달리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공간에 나를 밀어 넣는 느낌이다. 나의 사고 회로는 조금 특이하다고 생각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힘든 건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지만 언제 포기할지 정하는 건 본인의 몫이라고 했다. 나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며 뛰고는 했다.




정말 이상한 얘기지만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뇌가 나의 본체라고 생각했다. 몸의 일부분은 없어도 사는 데에 지장이 있는 정도겠지만 뇌는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 존재의 의의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부위라는 데에 있다. 조금 더 상세하게 말을 하자면 팔을 다쳐서 인공 팔을 쓴다고 해서 인간의 존재 가치는 바뀌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의 피부 조직을 가져와서 붙인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하지만 몸은 그대로인 상황에서 뇌에 조그마한 변화라도 생겼을 때 나 자신을 온전히 과거의 나와 동일선상에 둘 수 없다. 그러한 배경에서 나는 뇌가 명령을 한다면 적어도 내 몸의 모든 부위들은 명령에 무조건적인 복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리에게 멈추지 말라고 뇌에서 신호를 보내면 다리는 자신이 부서지는 걸 느끼는 한이 있더라도 뛰어야만 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유독 다리에만 부상이 있는 편이었다. 다리가 아프다는 신호를 보내면 “나약한 놈, 엄살 부리지 마“라고 생각하며 몸의 신호를 묵살하고는 했고, 그게 곧 부상으로 이어졌다. 낯간지러운 얘기지만, 극한의 상황에서는 가질 수 없는 것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예를 들면, 더 이상 뛸 수 없는 상황이라고 느낄 때, 결승선까지 쉬지 않고 뛴다면 보상으로 어마어마한 것을 받는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물론, 스스로에게 실제로 보상을 한 적은 없다. 대견하다기보다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규정을 지은 탓이 크다. 돌아보면 일 년에 달리는 시간이 최소 이백 시간은 될 텐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있어서 불분명하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달리는 걸까. 계속해서 달리다 보면 목표하는 곳에 닿을 수 있을까.




지금껏 책을 읽으며 이렇게까지 감동을 받아본 적이 없다. 아직까진 문학의 깊이가 얕은 탓도 있겠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생각들과 겹치는 부분들이 많다는 것은 나를 감동시켰다. 마치,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인간적으로 혹은 소설가로 존경을 하는지의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내게 큰 행복감을 주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나랑 상당 부분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좋아하지 않는 스스로의 모습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관점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속되는 네 페이지 정도의 문장들은 내게 글을 읽는 지금 이 순간이 참 행복하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누군가의 글을 읽고 행복해진다는 느낌, 나는 직접 쓴 글을 읽으며 행복해하는 사람이 아니다. 정말, 정말 가끔 책을 읽으며 사진을 찍어서 기록을 남기고는 하는데 (한 권을 읽으면 하나의 사진도 찍지 않을 때도 많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을 때는 너무 많은 사진을 찍어서 문제였다.







“21세기라는 것이 실제로 다가와서, 내가 정말로 50대를 맞이하게 될 줄은 젊었을 때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언젠가 21세기가 오고, 그땐 내가 50대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지만, 젊었을 때의 나에게 있어 50대의 내 모습을 떠올린다는 것은, “사후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상상해보라"라는 말을 들은 것과 같을 정도로 곤란한 일이었다.” 최근에 나도 언젠가 늙겠지?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을 들은 이가 내게 “그럼 당연히 늙지, 안 늙어?”라고 답을 했다. 나도 알고 있다. 언젠가 21세기도 절반 정도가 지나게 될 때가 그리고 21세기가 끝을 향해 달려갈 때가 올 것이라고. 하지만 그러한 사실과 별개로 나의 젊음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상상하는 건 내게도 사후세계를 상상하는 것과 버금갈 정도로 비현실적인 이야기였다.




“신체에 현실적인 짐을 지우고, 근육에 신음소리를 지르게 함으로써, 이해도의 눈금을 구체적으로 조금씩 높여가게 하여, 가까스로 납득하게 되는 타입인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러한 단계를 하나하나 밟아 나가면 사물의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 품도 든다. 때로는 시간이 너무 걸려 가까스로 납득을 했을 때는, 이미 때를 놓쳐버리게 된 경우도 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애당초 나라는 인간이기 때문에.” 미리 이해했더라면, 조금이라도 빨리 알았더라면 하는 문제들이 있다. 항상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후회가 물 밀듯이 밀려온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여기기로 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나라는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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