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질서
어릴 적 나는 VHS로 영화를 보던 시절에 살았다. 지금처럼 디지털 파일로 된 영화 감상이 아니었기에 인기작을 빌려오면 비디오 테이프가 늘어져서 플레이어에 자주 끼었다. 한 번은 씹힌 비디오 테이프를 구하자고 비디오 플레이어를 해체한 적이 있었는데, 해체했던 작업을 거꾸로 하면 원상 복귀가 될 거라 굳게 믿었다. 나사를 풀고 플레이어 뚜껑을 열어 늘어진 비디오테이프를 구하고 안도하였을 때, 문제는 그 뒤에 일어났다. 해체 작업 그대로 거꾸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가 다시 원상 복귀되지 않았다. 열쇠 구멍을 고치겠다고 문을 통째로 망가트린 상황이 되어버렸으니 돌이킬 수가 없었다. 해체 전으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후회해도 이미 시간은 흘렀고, 플레이어는 와해되었다.
인간은 우주의 질서에 종속되어 살아간다. 우주의 질서를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의 미래를 예측하는 일이기도 하다. 열역학 법칙으로 알려진 우주의 질서 중 하나는 '세상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자연 상태에선 절대로 무질서(혼돈)에서 질서로 역행할 수가 없다. 이런 무질서함의 정도를 측정하는 것이 바로 '엔트로피'이다. 세상은 점점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식으로 변화한다. 엔트로피 증가가 극단으로 닿았을 때, 우리의 삶은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이란 나를 이루던 원자들이 뿔뿔이 해체되는 작업이기도 하다. 와해된 비디오 플레이어를 과거의 모습 그대로 복귀시키는 방법은 애석하게도 없다.
무질서로 나아가는 것이 엔트로피의 증가라면 그 반대는 네거티브의 뜻을 가진 '네겐트로피 또는 네트로피'로 불린다. 음과 양, 빛과 어둠, +와 -처럼 혼돈과 질서가 서로 대척하고 있다. 세상에는 모순이 동시 존재하는데 동양의 기호처럼 음과 양은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에너지의 중심에는 대척점을 이루는 에너지가 중심을 잡고 있다. 우로보로스처럼 자신을 먹으면서 자신을 탄생시키는 형상이다. 양(量)의 척도로 들어오기 시작하면 정답은 없다. '과유불급' 좋은 것도 지나치면 극단이 되어버린다. 인간에게 산소는 생명을 연장시키는 약이지만 그 양(量)이 넘어서면 몸에서 독이 되어 목숨을 앗아간다. 엔트로피와 네겐트로피도 마찬가지이다. 질서를 부여하여 '혼돈'을 억제하는 네겐트로피가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엔트로피가 없다면 자연 그리고 인간에게 성장은 없다.
두 가지 정말 판이한 주장을 하는 회사가 있다. 회사의 90%를 구조화시켰다는 무인양품과, 최대한 모든 룰 (구조)를 없앴다는 넷플릭스이다. 철저한 질서가 실행력을 올릴 수 있다는 무인양품과 모든 규칙을 깨면 실적을 향상할 수 있다는 넷플릭스. 그들은 왜 이렇게 다른 선택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이 두 가지 다른 선택은 모두 두 회사를 성장시켰을까?
무인양품은 아주 세세한 작업들 모두 매뉴얼로 만든 회사다. 옷을 어떻게 디스플레이해야 하는지, 고객을 응대하는 절차라든지, 심지어 부하 직원에게 주의 주기에 대한 매뉴얼도 존재한다. 언뜻 보면 숨 막힐 정도로 모든 것이 질서정연해 보인다. 하지만 더 들여다보면 무인양품이 왜 이런 구조를 갖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무인양품은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슬로건으로 자연 친화적 브랜드를 만들었다. 모든 제품들은 미니멀의 극치로 느껴질 정도로 모던하다. 자연에서 나오지 않는 색상은 사용하지 않고, 상표도 무늬도 화려한 디자인도 없다. 일상에서 편하게 입는 옷을 추구하기에 타이트한 옷 디자인도 볼 수가 없다. 점, 선, 면이라는 작은 단위를 이용해 고객들 스스로가 다양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옷이 무인양품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다채로움보다 '기본'과 '본질'에 충실함이다. 그 본질을 지키기 위해 무인양품은 철저한 질서를 선택했다. 무인양품은 의류 브랜드 특성상 물류가 있고 매장이 있고 고객을 직접 응대해야 하는 직원들이 있다. '우수한 인재는 모이지 않는다. 그러니 키우는 구조를 만들어라'라는 마인드 아래 그들은 감과 경험을 배제하고 데이터를 축적하여 매뉴얼을 만든다. 매뉴얼을 만드는 것에만 포커스를 뒀다면 무인양품은 얼마 못 가 감옥 같은 회사가 되었을 테지만, 그들은 매뉴얼이 실행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무인양품은 PDCA 사이클(계획, 실행, 평가, 개선)을 반복하며 계속해서 그들의 매뉴얼을 바꿔나간다. '누구'의 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이 우리의 본질을 잃지 않는가가 그들에게 중요하다.
OTT 시대에 절대강자 넷플릭스는 규칙이 없기로 유명하다. 휴가 시간, 결재, 승인 절차, 비용 사용 등 모든 것이 자율에 맡겨진다. 이렇게도 회사가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생각이 들다가도 자율성 뒤에 숨겨진 냉혹한 결과주의 환경을 보노라면 오싹하다. 넷플릭스는 최고의 인재에게 업계 최고의 보상을 하는 회사이다. 1명의 인재가 평범한 인재보다 2-3배가 아닌 20-30배의 실적을 가지고 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대했던 인재가 실적을 내지 못한다면 가차 없이 업계 최고의 퇴직금을 주고 내보낸다. 그들은 회사의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자기 증명을 해야 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무인양품과 다른 막강한 자율성은 넷플릭스가 추구하는 방향과 맞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라이벌은 인간의 수면시간이다.'라고 외치는 넷플릭스는 무인양품처럼 물질 상품이 있는 회사가 아니다. 그들은 인간의 창의성을 돈으로 바꾼다. 잠을 줄여가면서까지 넷플릭스를 시청할 수 있는 힘은 인간의 감정과 심리에서 나온다. 그렇기에 넷플릭스에게 중요한 건, 기본이 아니라 그 기본을 해체하는 파괴적 창의력이다.
양(量)에서부턴 정답은 없다고 했다. 양을 조절하는 판단은 모두 자신 또는 회사의 철학에 따라 달라진다. 철학이 없는 회사라면 줏대 없이 그 기준들이 오락가락하겠지만, 자신들의 경영 철학이 명확한 회사일 수록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아주 디테일한 척도를 세울 수 있다. 막강한 질서를 부여할 것인가? 아니면 무질서를 통해 어마어마한 성장을 꾀할 것인가? 무엇이든 자신 만의 명확한 기준을 세워 질서와 무질서에서 줄타기를 해야 한다.
과학이 알아낸 현재까지 참된 명제는 '우주의 질서는 언제나 엔트로피 상승(무질서)으로 나아간다'였다. 그 우주의 질서 속에 사는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계속해서 혼돈과 해체, 잉여 에너지의 상승 속에 놓여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나날이 복잡해지고 있다. 절망적인 일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복잡해질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무질서로만 나아간다.
우리는 '새로운 질서'를 고민해본다. 질서를 부여한다는 것은 단순히 규칙을 정하고 그것에만 맞춰서 사는 것이 아니다. 엔트로피를 상승시키는 요인을 찾아 잉여 에너지를 줄이고 혼돈을 막을 방안을 강구하는 일이다. 변해버린 시대를 마주보며 수평적 토의와 깊은 사유를 지속하여야 한다. 우리는 학교, 정치, 문화, 의료, 일상에 걸친 상당한 부분을 재정비 해야 하는 순간에 도래했다. 세상은 변해가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도 변하고 있다.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요인들
1. 경우의 수 증가
2. 불확실성이 큰 것
3. 정보의 과부하 또는 부족
4. 다른 사람/단계의 개입
5.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
6. 질서(규율)가 없는 것
7. 감정이 개입되는 것
8. 투명하지 못한 것
9. 수로 측정하기 어려운 것
10. 자연/물리적인 것 (살아있는/변화하는)
11. 자율성이 강한 것
12. 성장/확장 단계에 놓인 것
13. 분산되어 있는 것
새로운 질서 : (1) A.I 네겐트로피 시스템
A.I는 우주의 질서를 벗어난다. 영화 테넷처럼 이미 상승한 엔트로피를 거꾸로 돌리는 상상은 현실에선 불가능하지만 +,-의 상보성처럼 A.I로 네겐트로피를 올려 균형과 조화를 이뤄낼 수 있다. A.I가 우주의 질서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절대로 우주의 원리보다 위대하다는 것임을 나타내지 않는다. 두 영역은 다른 질서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 A.I는 Organize 능력에서 절대적 강세를 보인다. 인간이 하루에 읽을 수 있는 논문의 수만 배의 정보를 불과 몇 초만에 받아들이고 정렬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분산된 정보를 한데 모아 체계화된 정보로 전환하여 제공한다. A.I가 발달되며 지식의 민주주의가 일어났고, 정치와 경제 사업에 만연했던 불투명하고 은밀한 껍질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구체화되지 않았던 것을 수치화하여 더 공정한 경쟁을 가능케 했으며, 복잡한 단계를 자동화하여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도록 도왔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대다수의 테크놀러지 기술이 Organize 기술을 기반으로 우리 삶에 질서를 찾아가도록 돕고 있다.
최근 인간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코로나로 예시를 들어보자. 코로나는 바이러스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는 인간을 숙주 삼아 살아있는 채로 계속 변이 바이러스를 만들어낸다. 감염된 사람의 수가 증가할수록 경우의 수는 무수히 증가하여 불확실성은 커져만 간다.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 않기에 수로 측정되기 어려워 그 위력과 파괴력을 바로 인지하기에도 쉽지 않다. 코로나 바이러스 하나가 인간의 네트워크를 쑥대밭을 만들어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코로나 바이러스가 만들어내는 엔트로피는 증가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패닉에 가까운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이 상황에 맞춰 A.I를 이용하여 네겐트로피를 올려가기 시작했다. 확진자의 동선을 투명하게 공유하고, 확진자를 수로 측정하여 바이러스의 위력을 가시화하였다. 앱을 통해 마스크 잔여 개수를 알려주었고, 큐알 코드를 통해 불확실성이 높았던 경우의 수들을 데이터화하였다. 끝없는 혼돈에 빠질 수도 있었던 대재앙 앞에서 재빨리 질서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인간성의 반대는 A.I가 아니다. '인간성'에 대한 끝없는 질문이 함께한다면 A.I 네겐트로피 시스템은 인간에게 새로운 질서 중 하나로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새로운 질서 : (2) 비우기
비우고 치우고 없애라. 그렇다면 무질서에서 벗어나서 단순해질 수 있다. 단순함은 명확하고 강하기 때문에 본질에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질수록 그것은 동시에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소유로 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닌 오로지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이해해야 한다. 육체와 정신의 노폐물을 비우고 맑은 마음으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삶의 질서를 바로 세울 수 있다.
영화 <아키라>에서 테츠오는 초인적인 힘을 자랑하며 우쭐대지만 카네다는 "이 쓰레기 산의 왕이 되었냐"며 테츠오를 비웃었다. 결국, 테츠오는 초인적으로 커져가는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몸이 부풀어 올라 터져 죽는다. 자본주의는 부풀어 터져버린 테츠오의 육신과도 같다. 질서를 부여받지 못한 잉여 에너지는 '기능' 손실을 겪지 않고도 쓰레기가 된다. 더러운 방을 방치하면 주객이 전도되어 나 또한 하나의 쓰레기로 전락한다. 우리는 그곳에서 더욱더 많은 것을 소유했음에 자만하며 동시에 괴로워할 것이다. ‘더 많이’를 요구하는 세상에서 꾸준히 비우고 치우고 버려라. 비워진 곳에서 새로움은 태어난다.
미국의 범죄학자인 제임스 윌슨(James Q. Wilson)과 조지 켈링(George L. Kelling)이 공동 발표한 '깨진 유리창 이론 (Broken Windows Theory)'은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해 두면 그 지점을 중심으로 범죄가 확산되기 시작한다는 이론이다. 사소한 무질서를 방치했다간 나중엔 전체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파괴가 시작되었을 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금세 무질서에 익숙해져 유리창 그 이상을 파괴하는 것에 대해도 일절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논어에서 공자는 ‘균형이 이뤄지면 빈궁도 없고, 모두가 화목하면 재부가 부족하다고 느낄 리 없으며 안정이 되면 곧 전복될 위험도 없다’라고 말했다. 쏠림은 힘과 동시에 붕괴이다. 생은 사를 불러오고, 사는 생을 탄생 시킨다. 들어온 것은 나가고 희비는 돌고 돈다. 엔트로피로 인해 혼돈이 증가한다면 삶에서 네겐트로피를 상승시키는 노력을 가해야 하고, 네겐트로피로 인해 성장없는 정체에 갇혔다면 엔트로피를 상승시켜 변화를 꾀해야만 한다. 끝없는 균형의 줄타기. 우리는 모두 삶을 타는 광대가 아닐까. 이왕 위태로운 줄 위에 발을 올렸다면 균형을 맞추며 신명나게 몸을 흔들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