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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일기

내가 산책에서 본 것들

by 파도 Mar 14. 2025

내가 생각하기에 산책 정신은 가벼움이다. 가벼운 옷차림, 가벼운 신발, 가벼운 마음으로.

여기서 중요한 건 절대로 검열하지 않는 것이다. 감정의 오고 가는. 생각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am 세면대가 막혔다. 세면대가 막히면 뚫어펑이라는 용액을 붓고, 30분 정도 기다리면 자연스레 세면대의 물이 시원하게 내려간다. 내 감정의 수챗구멍도 무언가 용액을 부으면 시원하게 내려갔으면 좋겠는 마음 든다. 나는 머리가 어지러울 땐 산책을 나간다. 방 안에서 이리저리 생각하다 보면 방의 크기만큼 생각이 갇히는 법이다. 손바닥만 한 일기장에 생각을 적어나가면 딱 그만큼의 호흡으로 내 감정을 이야기하고 끝마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딱 그 정도의 크기로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는 단점. 


그에 비해 산책은 크기를 정하기가 애매하다는 점이다. 발길이 닿는 곳이 특정되지 않기 때문에, 순간의 이끌림에 따라 오늘의 산책 경로가 달라진다. 이리저리 걷다 보면 내 생각의 크기가 둥둥 떠다니다가 사라진다. 



1. 바퀴 달린 실내용 의자 1. 바퀴 달린 실내용 의자 


pm 길을 걷다 보면 클린하우스 옆에 놓인 가구들, 쓰다가 내놓은 물건들을 적지 않게 관찰할 수 있다. 

오늘 내가 본 것은 연노란색의 푹신한 의자이다. 의자를 보면 가만히 생각하는 사람이 앉아있는 거 같다. 바퀴가 달린 의자는 그만큼 유연한 생각을 가질 것이다. 가로와 세로로 뻗는 노출된 배관 앞의 의자. 

누군가가 앉고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을 실내용 의자가 이제는 여유롭게 바깥공기를 쐬고 있다. 대형폐기물 스티커가 붙여진 채로.




새로 생긴 카페새로 생긴 카페


누군가에게 소소하지만 나한테 만큼은 가슴이 설레는 일이 있다. 바로 '새로 생긴 카페에 가기'. 카페 취향에 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난 그래도 웬만한 카페를 다 좋아하는 편이다.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카페에 있는 동안만큼은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 오늘 간 카페는 코히동 시오리라는 이름을 가진 동네 카페이다. 

어렸을 때 하던 농담.. 개미의 집 주소는? "개미허리는 가늘군 만지면 부서지리"를 조용히 읊조리게 된다. 아주 귀여운 카페 이름인 거 같다. 





브런치 글 이미지 3


시오빵이 주 메뉴인 거 같아, 시오빵과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산책에 걸맞게 버지니아 울프의 <런던거리 헤매기>를 떠올리며, 런던 그림이 그려진 수첩을 꺼내든다. 이 수첩은 내가 산책할 때 드는 생각을 가볍게 적기 위한 용도로 샀던 이다.

그 옆에는 버지니아울프의 에세이를 묶은 책을 꺼내 들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런던거리 헤매기에는 그런 장면이 나온다. 연필을 사기 위해 거리를 헤매는.


연필을 사기 위해, 밖을 나갔던 적이 있다. 그녀를 떠올린다. 그때도 블랙윙 연필을 사기 위해서 집을 나서고, 연필을 손에 쥐고 산책을 했다. 

이 공책도 우연히 들어간 책방에 있던 수첩이었다. 그런 추억을 떠올리며, 책을 편다. 일상의 잡음들 속에서 유일하게 고요한 독서의 순간이다. 그래서 내가 카페를 좋아하는 거 같다. 카페에 가만히 앉아서 독서라는 행위에만 매달릴 수 있어서.



아쉽게도 오늘의 산책은 이렇게 끝이 났다. 동네를 돌다가, 세탁소에 들러 겨울을 마무리하는 기념으로 맡긴 두꺼운 코트 두 벌을 세탁소에서 찾고 천천히 집으로 향한다.


산책하며 든 생각 일지

일상의 반복 속에서 '설렘'을 느끼는 일은 참 중요하다. 그 설렘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아야 한다.
너무 큰 설렘이면 자극에 취약한 나에게 너무나 큰 폭풍을 만들고, 그게 가벼우면 설렘이라고 알아차리기 어렵다. 오늘의 산책에서는 식물이 가득 영글어 있는 집을 다시 한번 보며 감탄했고, 테라스에 빨랫줄을 걸어 스트라이프 양말, 알록달록한 수건들을 보았다. 요즈음에는 흐린 날들이 이어졌고 그에 맞추어 내 기분도 저온을 유지했다. 일상을 지속하는 증거들을 골목에서 볼 때면 그럼에도 삶은 이어지고 그 흐름을 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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