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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동 Feb 02. 2024

아끈다랑쉬오름

떠도는 넋처럼 흔들리는 억새풀

다랑쉬오름을 내려서면서 아끈다랑쉬오름을 바라본다. 굼부리 전체가 억새풀로 뒤덮여 있다. 다랑쉬오름에서 내려와 맞은편 정자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200m쯤 들어가서 사면을 오른다.

아끈다랑쉬는 만만하게 보인다.

우선 자그마하다. '아끈'은 '버금가는'이란 뜻이니 '작은 다랑쉬'다. 해발 198m, 비고 58m로 주차장에서 정상까지 400m라 빠르게 다녀올 수 있는 거리다. '이곳은 사유지이므로 안전사고의 책임은 탐방자에게 있다'는 경고성 안내문이 조금 찝찝하기는 하지만 예사로 생각한다. 탐방로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기우가 현실로 다가온다. 경사가 꽤 가파르고 미끄럽다. 질펀한 흙길이다. 트레킹화가 필수 준비품이다. 길도 좁다.

또 하나는 볼품이 다.

굼부리는 둘레가 600m, 깊이가 10m 정도로 펑퍼짐하다. 정상부에 후박나무 달랑 한 그루가 서 있고 무덤 한 기뿐이니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펑퍼짐한 굼부리

이 생각 역시 바로 탄핵된다.

평평한 굼부리 전체가 온통 억새풀로 뒤덮여 있다. 은빛 물결이 일렁이는 평원은 억새풀이 펼치는 가을 향연장이다. 바로 앞에 후박나무가 굼부리를 지키고 섰다. 후박나무에서 오른굼부리 능선으로 방향을 잡는다.

정상에서 서쪽으로 돌아보면 다랑쉬오름의 늠름한 모습이 믿음직스럽다. 그 앞의 억새들은 햇빛에 반사되어 춤을 춘다. 남쪽 건너편은 용눈이오름이 여성스러운 자태를 드러낸다.

다랑쉬오름(위), 용눈이오름(아래 왼쪽), 은다리오름과 성산일출봉(아래 오른쪽)

굼부리 가장자리를 따라 한 바퀴 돈다. 동쪽 바다를 조망한다. 왼쪽 지미봉, 가운데 두산봉, 그 뒤에 우도, 오른쪽 은다리오름과 성산일출봉, 상도리에서 종달리로 펼쳐지는 녹색 경작지, 시시각각 변화는 구름이 그림을 그린다. 아름다운 풍경을 당겨 잡는다.

동쪽 바다

북쪽 능선에서 굼부리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억새밭 사이로 걸어 들어간다. 바람에 일렁이는 억새풀은 한 방향으로 허리를 굽히며 바람을 형상화한다. 굼부리 남쪽 능선에 탐방객 서너 명이 점이 되어 움직인다. 다양한 형태의 구름이 하늘을 복잡하게 만든다.

굼부리 안에서 본 남쪽 능선

우리와 반대쪽으로 걷는 사람이 맞은편에서 오면서 길을 묻는다. 혼자 걸으니 겁이 나는 모양이다. 굼부리 안쪽으로 들어가면 길을 잃을 수 있다. 고도는 낮아지고 들어갈수록 억새의 키는 높아지니 방향감각을 잃기 쉽다. 굼부리 주변에 특별한 지형지물이 보이지 않는다. 고씨 할망의 묘소와 후박나무 외에는. 능선 가장자리로 걸을 것을 한다. 능선 초입에 홀로 서 있는 후박나무가 이정표 역할을 한다.

이정표 역할을 하는 후박나무와 고씨 무덤

탐방로 주변의 넓은 밭에 메밀꽃이 피어 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 풍경이다.


주차장에서 용눈이오름 방면으로 6백m 쯤 떨어진 곳에 '잃어버린 마을 다랑쉬'표석이 세워져 있다. 구좌면 다랑쉬마을 터다. 10여 가호 40여 명의 다랑쉬마을 주민들은 메밀, 조, 피 등을 일구며 살았다. 4·3 때 소개령으로 평화롭던 마을은 전소되고 사람이 살지 않는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잃어버린 마을, 다랑쉬

지금은 대나무와 팽나무가 집터를 지키고 있다. 오늘도 까치는 나무 위에 앉아 마을 사람들을 기다린다. (2023.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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