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 계간<니>45호, '부모 자격 있나'
엄마와는 반대인 엄마가 되고 싶었다. 또 나와 반대로 내 아이는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언지 알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되길 원했다. 하지만 막상 엄마가 되어 몇 년 살아보니 아이 키우길 힘들어하고 아이의 요구에 더 힘들어하는 나의 모습이 엄마와 다르지 않음을 절실히 느낀다.
우리 집은 딸이 셋인데 나이 차이가 많지 않아 터울 적은 여자아이들 셋을 키우며 엄마는 많이 힘들어하셨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 휴가를 가거나 외식을 한 기억이 거의 없다. 우리가 좀 커서 시끄럽거나 골치 아프게 엄마 속을 썩이는 일이 생기면 엄마는 “저것들을 다시 뱃속으로 넣을 수도 없고…”란 말을 자주 했다. 특히 가운데 동생이 관심 가져 달라, 사 달라, 해 달라 계속 요구할 때나 내가 크면서 엄마가 원하는 대로 가주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힘들어하셨다.
그러다 보니 아이를 키우는 건 힘들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 꽉 들어차 있어 결혼하기도 싫었다. 결혼 후에 아이를 하나 낳고는 둘은 못 키우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하긴 딸을 낳는 것도 무서웠다. 왠지 아들이 더 수월할 것 같았다. 딸인 것도, 만약 둘 이상 낳는다면 터울이 밭은 것도 경계하는 마음이 들었다. 예전 우리 집과 같은 상황이 될까 봐 두려웠다.
엄마는 주변 사람 도움 없이 딸 셋을 키우기가 얼마나 막막하고 힘들었는지 자주 얘기했다. “많이 낳을수록 산후조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막내를 낳았는데 아빠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남편은 필요한 순간 없거나 쓸모없었다, 둘째와 셋째가 딱 1년 차이라 둘째가 샘이 많아졌다, 힘들어도 아이들 셋이 엄마만 바라보니 라면이라도 끓여 먹었다…” 등등. 긴 시간 속의 많은 기억 안에서 엄마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큰딸인 내가 도와주기를 바랐고 나는 그래야 했다. 동생들이 없는 상황, 내가 외동이거나 막내인 상황을 상상하기도 했다.
첫아이를 낳기 전에는 아이 생기면 같이 맛있는 것 많이 먹고 재미있는 곳에 자주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낳고는 거기에 더해서 건강한 생활습관을 길러주자 마음먹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밥도 골고루 잘 먹고…. 어려서부터 좋은 습관이 들어야 어른이 된 후에도 부지런하고 건강할 거라고 믿었다. 내게 그런 자산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고(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부지런한 것) 어떤 면은 있었다고 생각했기에(밥 골고루 잘 먹는 것) 내 아이에게도 그 부분을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육아책을 보니, 특히 소아과 의사가 쓴 책을 기준으로 삼아보니 내 아이가 발달상황에 맞지 않으면 엄마인 내가 제대로 훈련시키지 못해서라고 여겼다(물론 책에서는 아이들마다 개인차가 있다고 분명히 언급했지만 난 좋은 습관이라 여긴 그것들을 다 갖게 하고 싶었다). 아이 키우기 힘들다고 느낀 때가 그즈음부터였다. 특히 한밤 수유를 끊을 때 마음고생이 심해졌다. 책에서 생후 7~8개월쯤에는 끊을 수 있고 그때 끊어야 수월하다고 해서 시도를 했는데 아이가 많이 울었다.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은 밤마다 도대체 뭐 하는 거냐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난 도움과 격려가 필요한데 외면하는 남편이 쓸모없다 느꼈다, 엄마처럼. 아빠 탓을 하는 엄마가 불행했다 여겼기에 나도 불행하단 느낌에 휩싸였다.
나 역시 누군가와, 특히 남편과 같이 아이를 키우고 싶었으며 당연히 남편이 참여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커졌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혼자만 고군분투하다가 낙오된 느낌이 들어 혼자 뚝 떨어져 있다는 게 더 힘들고 화가 났다. 협력을 바랐지만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몰랐고 요구하고 설득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더더욱 몰랐다. 그저 다그치기만 하고 실망하면서 혼자 하는 육아에 익숙해져 갔다. 남편이 그나마 아이와 잘 놀아주긴 하는지, 내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아빠 노릇이나 하고 있는지 감시의 눈길로 봤다.
아이가 좀 크자 밖에 나가 이것저것 보여주고 친구와 만나는데 신경 쓰게 됐다. 문화센터도 다니고 여기저기 행사 있는 곳도 알아봐 찾아가고 멀리 사는 내 친구네도 자주 갔다. 사람들을 새로 사귀기보다는 예전 친구들이 편했기에 아이를 키우는 친구 집에 놀러 갈 때 주로 나 혼자 데리고 다녔다. 아이도 버스 타고 지하철 타는 걸 신기해하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잘하고 있는 거라 여겼다. 남편도 아이와 여기저기 다니며 구경하고 체험하는 것이 교육상 좋다고 여겼다. 그런데 아이가 더 크고 나서는 멀리 돌아다니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이는 동네에서 친구들과 놀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나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게 쉽지 동네에서 놀기 싫었다. 결국은 아이가 원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왔다. 아이의 요구를 알아갈수록 아이의 생각을 몰랐을 때가 더 편했다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방향으로 아이를 유도하려니 힘도 들고 잘 안 되면 짜증도 났기 때문이다.
큰아이가 지금 8살. 아이는 내가 보여주고 싶고 가르쳐주고 싶은 것만 배우는 게 아니었다. 난 이런저런 다양한 경험을 해보게 하려고 무리를 했는데 아이는 거기서 뭘 느끼는 것이 아니라 힘들어하고 짜증 내는 엄마를 보고 있었다. 아이가 짜증 내거나 화를 내면 남편은 “누구 보고 배웠겠어?” 하며 지나가는데 얄밉지만 반박할 수 없다.
아이와, 아니 이제는 둘이 됐으니 아이들과 사는 데 있어서는 애써 준비한 휴가, 놀이 같은 이벤트가 아니라 하루하루 자연스레 소소한 일상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알아가고 있다. 눈 맞추자는 아이들의 장난에 맞장구도 치고 자기 전에 이야기도 나누며 아이들이 하는 말과 행동에 관심을 기울이려고 한다. 아직도 힘들다는 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올 때가 있는데 습관적인 말인지, 내 컨디션 때문인지, 아이들이 나를 정말 힘들게 하는 건지 구분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곤 이야기한다. 나한테, 아이들한테, 남편한테, 그리고 알트루사 모람들에게도. 아이들이 나중에 엄마를 기억할 때 힘들어하기만 한 엄마로 기억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힘들다 말고 사랑한다, 좋아한다는 마음 표현도 많이 하려고 한다. 돌아가신 엄마도 마음은 이랬으려나?
♥정은선 _ 알트루사를 만나고,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부터 나만 보다가 주변 사람, 이웃, 지역에 관심을 갖게 됐다. 남편과 8살 세훈이, 2살 세진이와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