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들레 Nov 28. 2022

반대로 반대로

2016.12 계간<니>45호, '부모 자격 있나'


엄마와는 반대인 엄마가 되고 싶었다. 또 나와 반대로 내 아이는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언지 알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되길 원했다. 하지만 막상 엄마가 되어 몇 년 살아보니 아이 키우길 힘들어하고 아이의 요구에 더 힘들어하는 나의 모습이 엄마와 다르지 않음을 절실히 느낀다.



우리 집은 딸이 셋인데 나이 차이가 많지 않아 터울 적은 여자아이들 셋을 키우며 엄마는 많이 힘들어하셨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 휴가를 가거나 외식을 한 기억이 거의 없다. 우리가 좀 커서 시끄럽거나 골치 아프게 엄마 속을 썩이는 일이 생기면 엄마는 “저것들을 다시 뱃속으로 넣을 수도 없고…”란 말을 자주 했다. 특히 가운데 동생이 관심 가져 달라, 사 달라, 해 달라 계속 요구할 때나 내가 크면서 엄마가 원하는 대로 가주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힘들어하셨다.


그러다 보니 아이를 키우는 건 힘들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 꽉 들어차 있어 결혼하기도 싫었다. 결혼 후에 아이를 하나 낳고는 둘은 못 키우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하긴 딸을 낳는 것도 무서웠다. 왠지 아들이 더 수월할 것 같았다. 딸인 것도, 만약 둘 이상 낳는다면 터울이 밭은 것도 경계하는 마음이 들었다. 예전 우리 집과 같은 상황이 될까 봐 두려웠다.


엄마는 주변 사람 도움 없이 딸 셋을 키우기가 얼마나 막막하고 힘들었는지 자주 얘기했다. “많이 낳을수록 산후조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막내를 낳았는데 아빠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남편은 필요한 순간 없거나 쓸모없었다, 둘째와 셋째가 딱 1년 차이라 둘째가 샘이 많아졌다, 힘들어도 아이들 셋이 엄마만 바라보니 라면이라도 끓여 먹었다…” 등등. 긴 시간 속의 많은 기억 안에서 엄마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큰딸인 내가 도와주기를 바랐고 나는 그래야 했다. 동생들이 없는 상황, 내가 외동이거나 막내인 상황을 상상하기도 했다.




첫아이를 낳기 전에는 아이 생기면 같이 맛있는 것 많이 먹고 재미있는 곳에 자주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낳고는 거기에 더해서 건강한 생활습관을 길러주자 마음먹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밥도 골고루 잘 먹고…. 어려서부터 좋은 습관이 들어야 어른이 된 후에도 부지런하고 건강할 거라고 믿었다. 내게 그런 자산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고(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부지런한 것) 어떤 면은 있었다고 생각했기에(밥 골고루 잘 먹는 것) 내 아이에게도 그 부분을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육아책을 보니, 특히 소아과 의사가 쓴 책을 기준으로 삼아보니 내 아이가 발달상황에 맞지 않으면 엄마인 내가 제대로 훈련시키지 못해서라고 여겼다(물론 책에서는 아이들마다 개인차가 있다고 분명히 언급했지만 난 좋은 습관이라 여긴 그것들을 다 갖게 하고 싶었다). 아이 키우기 힘들다고 느낀 때가 그즈음부터였다. 특히 한밤 수유를 끊을 때 마음고생이 심해졌다. 책에서 생후 7~8개월쯤에는 끊을 수 있고 그때 끊어야 수월하다고 해서 시도를 했는데 아이가 많이 울었다.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은 밤마다 도대체 뭐 하는 거냐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난 도움과 격려가 필요한데 외면하는 남편이 쓸모없다 느꼈다, 엄마처럼. 아빠 탓을 하는 엄마가 불행했다 여겼기에 나도 불행하단 느낌에 휩싸였다.


나 역시 누군가와, 특히 남편과 같이 아이를 키우고 싶었으며 당연히 남편이 참여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커졌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혼자만 고군분투하다가 낙오된 느낌이 들어 혼자 뚝 떨어져 있다는 게 더 힘들고 화가 났다. 협력을 바랐지만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몰랐고 요구하고 설득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더더욱 몰랐다. 그저 다그치기만 하고 실망하면서 혼자 하는 육아에 익숙해져 갔다. 남편이 그나마 아이와 잘 놀아주긴 하는지, 내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아빠 노릇이나 하고 있는지 감시의 눈길로 봤다.


아이가 좀 크자 밖에 나가 이것저것 보여주고 친구와 만나는데 신경 쓰게 됐다. 문화센터도 다니고 여기저기 행사 있는 곳도 알아봐 찾아가고 멀리 사는 내 친구네도 자주 갔다. 사람들을 새로 사귀기보다는 예전 친구들이 편했기에 아이를 키우는 친구 집에 놀러 갈 때 주로 나 혼자 데리고 다녔다. 아이도 버스 타고 지하철 타는 걸 신기해하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잘하고 있는 거라 여겼다. 남편도 아이와 여기저기 다니며 구경하고 체험하는 것이 교육상 좋다고 여겼다. 그런데 아이가 더 크고 나서는 멀리 돌아다니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이는 동네에서 친구들과 놀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나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게 쉽지 동네에서 놀기 싫었다. 결국은 아이가 원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왔다. 아이의 요구를 알아갈수록 아이의 생각을 몰랐을 때가 더 편했다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방향으로 아이를 유도하려니 힘도 들고 잘 안 되면 짜증도 났기 때문이다.




큰아이가 지금 8살. 아이는 내가 보여주고 싶고 가르쳐주고 싶은 것만 배우는 게 아니었다. 난 이런저런 다양한 경험을 해보게 하려고 무리를 했는데 아이는 거기서 뭘 느끼는 것이 아니라 힘들어하고 짜증 내는 엄마를 보고 있었다. 아이가 짜증 내거나 화를 내면 남편은 “누구 보고 배웠겠어?” 하며 지나가는데 얄밉지만 반박할 수 없다.


아이와, 아니 이제는 둘이 됐으니 아이들과 사는 데 있어서는 애써 준비한 휴가, 놀이 같은 이벤트가 아니라 하루하루 자연스레 소소한 일상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알아가고 있다. 눈 맞추자는 아이들의 장난에 맞장구도 치고 자기 전에 이야기도 나누며 아이들이 하는 말과 행동에 관심을 기울이려고 한다. 아직도 힘들다는 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올 때가 있는데 습관적인 말인지, 내 컨디션 때문인지, 아이들이 나를 정말 힘들게 하는 건지 구분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곤 이야기한다. 나한테, 아이들한테, 남편한테, 그리고 알트루사 모람들에게도. 아이들이 나중에 엄마를 기억할 때 힘들어하기만 한 엄마로 기억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힘들다 말고 사랑한다, 좋아한다는 마음 표현도 많이 하려고 한다. 돌아가신 엄마도 마음은 이랬으려나?



♥정은선 _ 알트루사를 만나고,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부터 나만 보다가 주변 사람, 이웃, 지역에 관심을 갖게 됐다. 남편과 8살 세훈이, 2살 세진이와 살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역지사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