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철학을 공부한다는 것, 그리고 탈레스
'수미잡'이라는 말이 있다. '수능 미만 잡것'이라는, 백날 모의고사 만점 받아봐야 수능 날 망치면 대학 못 간다는 뜻으로서 수험생들 사이에 진리처럼 통용되는 말이다. 내가 바로 그 수미잡의 전형이었다.
6월과 9월 영어 모의고사에서 총 1개를 틀렸다. 외국어에는 흥미도 없고 잘하지도 못했던 내가 두 차례 모의고사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니 자신감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한의예과가 안정지원이라며 호들갑을 떨면서,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나의 이 성적 향상의 방법을 널리 전파하겠다며 수능 전에 접수하는 수시 원서를 몽땅 영어교육과로 접수했다. 그리고 대망의 수능 날 대차게 영어를 망쳤다. 보기 좋게 대학에도 모두 떨어졌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처럼 자신감이 하늘 높이 치솟았던 만큼 패배감이 지하 끝까지 처박혔다. 역시 나 같은 애가 무슨 영어를 가르치겠다고 까불었을까. 대학 입시를 준비하며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했던 영어는 원망의 대상이 되었고, 이럴 거면 뭐하러 그 시간을 투자했을까 후회스러웠다.
어차피 해도 안 되는 공부라며 영어에는 손을 놨다. 대학에 가서 남들이 다 토익을 공부할 때에도 난 흥선대원군이 될 거라면서 최대한 영어를 피해 도망 다녔다. 그동안 공부했던 지식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닐 텐데, 수능 날 시험 한 번 망쳤다는 이유로 나는 나 자신을 영어 패배자로 만들었다.
그런데 슬픈 건, 이게 영어 하나만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려고 할 때 그게 결과적으로 어떤 결과물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가장 먼저 따졌다. 그리고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 것이라 생각되면 그것에 흥미가 있건 없건 시작도 전에 포기해버렸다. 말 그대로 이길 수 있는 싸움만 해댔다. 인간관계는 두말할 것도 없다. 결과적으로 눈에 보이는 이득을 가져다주지 않는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혼자 단정 지어버렸다.
그러다 문득, 아주 사소한 일로부터 내가 잘못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날은 우연히 무척이나 재미있어 보이는 대외활동을 찾은 날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재미있어 보이면 뭐하나. 대외활동 모집공고를 읽어보니 경쟁률이 너무 높아 준비해봤자 어차피 안 될 것 같아 모니터를 껐다. 그런데 그 순간 전원이 꺼진 검은 모니터 화면에 내 얼굴이 비쳤다.
검은 화면에 담긴 내 표정이 너무 불쌍하게 느껴졌다. 결과만 중요시하고 그 과정은 무시해오던 그동안의 행동이, 지금 하고 싶고 당장 할 수 있는 것들까지 시도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구나, 나 스스로를 불행한 삶으로 밀어 넣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때렸다.
새삼스러운 불행을 깨달았을 때, 고대철학을 공부하던 기억을 떠올린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대학교를 가야 한다는 자각도 없었을 시절, 인문학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는데 한 번쯤은 철학을 공부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고로 철학을 공부한다고 하면 두꺼운 책 정도는 겨드랑이에 끼고 읽어줘야 폼이 날 것 같았다. 마음먹은 김에 무작정 서점으로 향했다. 직원분께 인문학 코너가 어디 있는지 묻고 철학 파트를 살폈다. 그래, 어떤 학문이든 기본은 역사랬어. 호기롭게 두꺼운 철학사 책 한 권을 사 뿌듯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렇게 나의 첫 철학 공부는 딱 3일 만에 끝났다. 뒤늦게 천재성을 발견해 3일 만에 모든 내용을 독파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꾹 참고 읽어도 도저히 재미가 없어서 그만뒀다. 이건 전적으로 시작부터 날 괴롭게 만든 고대철학 탓이다.
대부분의 철학사는 고대철학부터 순서대로, 그중에서도 '탈레스'라는 이름을 마주하면서 시작된다. 이분이 철학의 아버지 되시는 분이란다.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더군다나 그 물은 일반적인 물도 아니고 '신성한' 물이라고 했다. 지구도 영혼을 갖는 유기체고, 물 위에 떠있는 것이란다. 에테르면 몰라도 신성한 물 위에 지구가 떠있다니. 그때부터 고대철학을 읽는 것이 곤욕이었다. 이미 현대 물리학에서 증명이 끝난 이야기를 애써 시간 내어 읽은 책에서 마주한다는 것이 재미도 없고, 왜 알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내가 생각한 철학은 이런 게 아니었단 말이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라든가, 푸코의 구조주의라든가, 무언가 심오하지만 어딘가 있어 보이는 지식들의 향연을 한껏 기대했단 말이다. 하지만 오케이. 뭐든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거니까. 꾹 참고 더 읽어보자. 생각해보면 내 몸 절반이 넘는 게 물이고, 물이 있어야 생명체가 탄생할 수 있다고도 하니까. 뭐 나도 엄마의 양수에서 태어났으니 백번 정도 양보하면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산 넘어 산이라고, 탈레스를 넘겼더니 누구는 불이 만물의 근원이라 하지를 않나, 물 불 공기 흙이 돌아가면서 만물의 근원이 된다고 하지를 않나 여전히 공부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건 똑같았다.
그렇게 곤욕스럽고 따분했던 고대철학이 새롭게 다가온 것은 대학교에 입학하고 전공필수과목으로 들었던 고대철학 수업 때문이다. 교수님은 고대철학을 공부할 때 결과가 아닌 과정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그리하여, 결과 중심으로 사고하던 그동안의 관성을 내려놓고, 즉 그들의 '결론'이 아니라 그 '과정' 속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그러자 탈레스가 새롭게 다가왔다.
특정 철학자가 내린 결론을 그대로 나의 지식으로 받아들이고자 할 때, 확실히 탈레스의 주장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세계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지도 않을뿐더러 으스댈만한 지식도 되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때의 나에게는 고대철학은 공부할 가치가 없음에도 꾸역꾸역 페이지를 읽어 넘겨야 하는 짐 따위에 불과했을 수밖에.
하지만 고대철학은 결론이 아닌 과정을 바라볼 때 비로소 가치가 생긴다.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는 주장이 정말 그러하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의 근원이 무엇인지 이성적인 생각을 통해 탐구하려는, 철학적 사유를 시작했다는 ‘과정’으로 인해 탈레스가 철학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듯이 말이다.
또, 철학사적 의미가 아닌 탈레스 개인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아마 탈레스는 세상의 근원을 탐구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린 결론은 명백하게 틀렸다. 그렇다면 탈레스의 사유 과정이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까? 아닐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탈레스는 끊임없는 탐구의 과정 속에서 정말로 행복했을 거다.
빛나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 있다는 것. 고대철학 수업을 통해 내가 배운 교훈이었다. 그런데 그 교훈을 여태까지 잊고 지내왔다.
어차피 결과는 내 손에 달려있지 않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원하는 결과값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고,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음에도 어쩌다 보니 괜찮은 결과물이 주어질 수도 있다. 결국엔 진인사대천명이다. 이 당연한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 나는 노력했음에도 좋은 결과가 따라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싫어서, 나의 노력이 다 부정당할까 봐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그러나 도망쳐 도착한 곳에 낙원이 있을 리가 없다. 난 내 삶의 매 순간을 불행한 두려움과 함께하고 있었다.
이제 나의 행복을 위해 결과만을 바라보는 시선을 내려놓기로 다짐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나의 '과정'을 예뻐해 주기로 했다. 물론 내가 뭐라도 되는 양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겁니다! 여러분들도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보세요!"라며 특별한 것이라도 깨달은 듯이 계몽주의자처럼 굴 생각은 없다. 다만 철학의 역사에서 탈레스가 값진 사유의 과정을 통해 철학사적 가치를 갖게 된 것처럼, 나는 나의 역사에서 값진 ‘과정’을 통해 내 삶의 가치를 만들어 갈 생각이다. 예전에는 내 삶에 무슨 실질적인 이득이 되겠냐며 엄두도 안 내던 글쓰기를, 지금 이렇게 도전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에서다. 나는 그냥 이 과정이 즐겁다. 무척이나 행복하다. 소확행이 별거냐. 앞으로도 난, 나의 손을 떠난 결과는 그대로 두고, 그것이 무엇이든 헤쳐나가는 과정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아갈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