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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제읽은철학 Mar 03. 2022

그럴수록 삐뚤어져

《장자》 제물론

A에게 온 전화를 받자마자 다소 격앙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꽤 친한 것으로 알고 있는 B와 싸웠다고 한다. 곧장 친구에게 어쩌다 싸우게 된 것이냐고 물어보니 대통령 선거 때문이라고 했다. 친한 사이일수록 종교 얘기나 정치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던데 A와 B도 대통령 후보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서로 감정이 상한 모양이었다. A의 말에 따르면 B가 자신이 지지하는 대통령 후보가 당선되면 나라가 망한다고, 그런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은 멍청한 것이라고 했단다. A는 통화를 하면서도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난 우선 진정할 시간이 필요해 보이는 A에게 일단 각자 밥부터 챙겨 먹고 다시 통화하자고 말했다.


지금은 그렇게 전화를 끊고, 잠시 후 A에게 어떤 얘기를 해주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는 중이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친구를 위한 고민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비슷할 상황을 겪게 될 나를 위해 고민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를 꺼리는 이유는 결국 그 대화의 주제가 너무도 쉽게 갈등을 빚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정치나 종교에서는 그 자신의 견해를 '신념'이라고 부를 정도로 각자가 자신의 생각을 굳게 믿고 있기에 더욱 문제가 된다. 대화가 이어지면서 누군가는 자신의 신념을 강요할 것이고, 상대방은 그러한 신념을 강요받으면서 본인의 신념이 공격받는다고 느끼기 때문에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진다.


그러나 마냥 이야기를 피하는 게 능사는 아닐 것이다. 특히 민주주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대화란 꼭 필요하다. 정치만 하더라도, 구성원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관점에서 비롯된 차이를 조율해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더 나은 세상, 더 좋은 나라를 만드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정치 얘기는 피할 수 없으며, 피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중요한 건 이러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어떠한 태도로 대화에 임해야 하는지다. 우리 서로의 가치관을 비난하지 않으면서 의견을 나누는 방법은 없는 걸까?


마땅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아서 한참 동안을 고민했다. 이런저런 기억을 떠올리고, 책장에 꽂힌 책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 끝에 적당한 책 한 권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장자다.


옛날에 원숭이를 기르던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주겠다"라고 하자 원숭이들은 모두 화를 냈다.
다시 "그러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 주겠다"라고 하자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하였다.


《장자》에는 고사성어 '조삼모사'의 유래가 된 이야기가 나온다. 보통 조삼모사는 당장의 이익만 생각한 나머지 결과가 같음을 모르는 어리석은 행동을 표현하거나, 잔꾀로 남을 속이는 행동을 표현할 때 쓰이곤 한다. 하지만 사실 장자의 원래 의도는 이렇게 알려진 뜻과 사뭇 다르다. 장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남을 속이는 기술이 아니라, 소통의 기술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를 주나,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를 주나 똑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원숭이의 마음은 철저히 외면당한 채로 놓이게 된다. 원숭이의 기준에서는 당장의 이익만을 고려한 게 아니라, 그로 인해 일어나는 미래의 이익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뚱뚱한 원숭이에게는 활동량이 많은 아침에 4개를 먹고, 저녁에 남은 3개를 먹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었을 수도 있다. 결과만 같으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은 사료의 ‘총량'이라는, 사육사의 절대적인 기준이 반영된 결과에 불과하다. 하지만 절대적인 기준은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는 것에만 절대적이라 장자는 말한다. 그가 볼 때 각자는 나름의 사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사자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나만의 잣대로 무언가를 판단하는 건 그 사람에게 일종의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진정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자신이 믿고 있는 절대적인 가치관이 다른 사람에게는 그러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러니까,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이란 건 없다. 모두는 자신에게 맞는 선택을 한 것일 뿐이다.


또, 이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다. 원숭이 오너의 입장에서는 어찌 주었든 원숭이가 행복하게 도토리를 받았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요즘엔 반려동물의 멘탈케어를 위해서 클래식도 들려주고 특별식을 준비하기도 한다는데 도토리 하나로 행복해할 수 있는 원숭이를 굳이 기분 나쁘게 만드는 건 도리어 손해가 될 뿐이다. 하물며 원숭이가 화를 좀 냈기로서니 멍청하다고 놀릴 일은 아니지 않은가. 어차피 나에게는 도토리를 이리 주나 저리 주나 똑같을 거라면 상대의 기분에 맞추어 주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다. 아니, 나의 상황은 변하지 않았는데 상대는 행복해졌다는 점에서, 결국 행복감의 총량이 늘어난다는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해볼 수도 있다.

같은 말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나에게 어차피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면, 상대를 위해 '아'를 '어'로 바꾸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상대방의 맥락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이왕이면 상대를 위해 배려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소통을 가능케 하는 대화의 본질이다.

대화 속에 칼날이 들어있다면, 그 칼날은 대화를 끊어내고 상대에게 상처를 입힌다.


정치나 종교와 같이 의견 충돌이 흔히 일어나는 주제에 있어선 자신의 신념만이 올바르고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기에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의 말을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기고 들어 보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는 사람도 많은 것이다. 하지만 민감한 이야기일수록, 이러한 소통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나의 신념을 상대에게 강요한다고 해서 상대의 마음이 변할리는 만무하다. 상대와 진정한 소통을 원한다면 무조건적인 강요나 고집을 버리고, 상대를 향해 마음을 열어야 한다. 당연히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나와 같은 역사 속에서 살아온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다른 역사 안에서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이려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거다.


만약 A B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신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후보를 지지하면서, 동시에 열린 마음으로 반대의 의견도 함께 들어보려 했다면 그토록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만드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화가 나서 나에게 전화를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둘의 관계가 서먹해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서로의 대화를 통해 그동안 바라보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으로 자신의 생각을 되짚어보며, 자신의 가치관을 더욱 뚜렷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시켰을 수도 있다.


물이 고이면 썩는다고 했다. 자신만의 생각으로 가득 차있는 사람은 독단적인 고집쟁이가 되어버릴 위험이 크다. 알면서도 실천하는 게 왜 이리 어려운지. 실은 나도 오랜만에 만난 지인에게 모진 말을 내뱉고 후회를 하고 있는 터였다. 힘들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는 동생에게, 세상 모두가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고 나약한 소리 그만하고 지금부터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라고 건방지게 내뱉었다. 그가 겪고 있는 심정적인 어려움을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자꾸만 내 곁을 떠나려는 것만 같은 동생의 약한 모습이 미웠다. 하지만 그에게는 단지 작은 위로 한 마디가 필요했던 건 아니었을까.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저 그동안의 힘듦을 위로받고 싶었던 건 아닐까. 왜 나는 오직 나의 입장에서만 그를 몰아세웠을까. 왜 당장의 내 기분만 중요했을까. 진정한 소통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고 다가가기에는 아직도 멀었다는 것을 느낀다.


그동안 여러 날들에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날 괴롭혀왔던 건, 어쩌면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했던 그들이 아니라 '너는 그런가 보구나'하며 넘기지 못한 나 자신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 이제 다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너도 나처럼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그러려니'하고 마음을 열어보라는 말을 전해야겠다. 그리고 동생에게도 그동안 많이 힘들었겠다고 그러니까 다시 힘내 보자고 때늦은 위로를 전해야겠다.






정신과 마음을 통일하려고 수고를 하면서도 모든 것이 같음을 알지 못하는 것을 '아침에 세 개'라고 말한다. 무엇을 '아침에 세 개'라고 하는가? 옛날에 원숭이를 기르던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주겠다(朝三暮四)"고 하자 원숭이들은 모두 화를 냈다. 다시 "그러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 주겠다"라고 하자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하였다. 명분이나 사실에 있어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기뻐하고 화내는 반응을 보인 것도 역시 그 때문이다. 그래서 성인은 모든 시비를 조화시켜 균형된 자연에 몸을 쉬는데, 이것을 일컬어 '자기와 만물 양편에 다 통하는 것'이라 한다. ― 《장자》, 제물론(齊物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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