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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증유의 가난을 대비한 행복 수업

by 정미영

해묵은 물건들이 집안 곳곳을 지키고 있습니다. 연륜은 깊지만 아직 성성해서 같이 늙어갈 오랜 친구처럼 든든하게 느껴집니다. 굴곡진 세월과 마주한 시간들이 도열하며 남아있는 서로의 여정을 격려해주는 것 같습니다. 한동안 차갑고 딱딱한 질감에 고정돼 삶의 주변부로 밀려나 있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해 묵히며 생물로의 변신을 거듭하더니 점점이 그 진면목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요. 그런 모습을 접할 때마다 새삼스레 상기된 표정을 짓게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말을 걸거나 얼굴을 비벼대기도 합니다. 고정된 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누구인들 이 같은 물질들을 가리켜 생명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공명을 일으킨 찰나의 순간은 노련해진 노년기에 섬광처럼 예리하게 번득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 늙어 나이 80에 이르러 마음을 관통하는 어떤 세계가 또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설렘이 벌써부터 일렁댑니다. 오늘 이 같은 물질들과 머문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습니다.


재활용처리 날에는 멀쩡한 물품들이 솔찬히 나옵니다. 가구와 생활소품들이 가장 많습니다. 사용기간이 아직도 유효한데 유행이 지나 싫증을 느끼고, 이사를 가면서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것이죠.

내겐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전자제품 삼형제가 있습니다. 맨 먼저 소개될 15살 난 브라운관 TV는 아직도 멀쩡합니다. 고마운 생각에 퉁퉁 건드리며 말을 건넵니다. “기특하시기도 하지, 나이 드셨어도 이렇게 잘 보여주시다니 감사해용~” 16년 된 김치냉장고도 끄떡없어요. 가끔씩 녹슬지 않도록 여러 개의 기능 버튼을 툭툭 건드려줄 정도의 자극만 줄 뿐이죠. 이사 도중 다리 하나가 부러져 부목인 상태에서도 불편한 기색 없이 잘 있습니다.

같은 연령대인 세탁기 통돌이는 어떤가요. 뒤 베란다 구석진 자리를 차지하다 보니 관심이 덜 갔던 놈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의 대면에도 녀석은 외로움을 타기는커녕 자못 의연합니다. 각종의 세탁물을 통째로 삼켜 달달거리는 소리를 내며 신명나게 해치우는 기능은 놈의 주특기죠. 에너지 측면에서도 알뜰살뜰하기가 이를 데 없지요.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햇볕 좋은 우리나라에서는 드럼형의 세탁기가 가당치 않을뿐더러 전력소모만 클 뿐입니다. 원래 햇볕이 부족한 나라에서 개발된 유럽풍의 드럼세탁기가 들어와 토종을 밀어낸 형국이지요.

이 외에 빠뜨릴 수 없는 녀석이 추가되는데요. 40년을 훌쩍 넘긴 기능성 나무식탁이죠. 4인 전용의 구조지만 1인 가구가 사용하기에 편리하게끔 신축성을 지녔어요. 좁은 공간에 설치 가능하도록 테이블 양면에 날개를 달았기 때문입니다. 인원수 조절에 맞게 접었다 펼칠 수 있게 제작된 것이죠. 접이식 나무의자도 개체 수만큼 꺼내 쓸 수 있게 테이블 중앙에 저장 공간을 두었습니다. 기염을 토할 만큼 독특한 구조의 아이디어상품이죠. 지금까지 사용하는데 어느 한구석도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단지 세월의 흔적으로 땟국물이 지고, 나뭇결의 일부가 얼룩덜룩할 뿐, 존재감엔 아무런 손상이 없습니다. 이 같은 제품을 만든 이들을 향한 감탄과 감사의 마음이 절로 솟구치게 하는 부분입니다.


그들로 인해 누려온 내 삶이 그 얼마며, 그 곁에서 함께한 내 성장의 시간도 소중할 수밖에 없는 지금, 기능성을 높인 신상품에 현혹돼 가용한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퇴물 처리할 수 있을까요. 이 고마운 물건들이 없었다면 내 손과 발이 헛된 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을 터. 비록 물질이지만 생명력으로서 우린 서로 연결되어 있고, 두터운 유대감을 느끼며, 서로의 파장에 몸을 내맡긴 채 공동체적 뿌리까지 내렸습니다.

이러니 새로운 기능이 정착된 새 제품의 홍보가 쏟아져 나와도 눈길을 보낼 수 없는 까닭인 거죠. 갖은 유혹의 손길이 뻗친다 해도 끄떡하지 않고 고장이 나면 수리해 사용할 것이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중고품으로 구입해 대체하리라고. 그런데 이 같은 각오에도 찬물을 끼얹게 하는 사진 한 편이 눈에 밟혔습니다.


‘물건들의 무덤’ 그냥 돌무덤도 아니고 세계 곳곳에 버려져 아직 쓸 만한데 수명을 일부러 폐기해버린 물건들의 무덤을 지칭한다니 기가 찰 노릇이더군요. 스마트폰 사용 폭증으로 필요 없게 된 공중전화부스의 무덤, 중국 충칭 외곽에 버려져 무용지물이 된 택시 무덤, 서아프리카 누아디부 항구 배들의 무덤, 항구가 쇠락하며 생겨난 닻들의 무덤 등등. 모두 처리비용 이유를 내세워 방치된 사진이라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사용주기가 겨우 2.7년에 불과하도록 제조된 스마트폰이 향후 주범의 자리에 오를 것이란 점이었죠. 스마트폰 하나에 들어가는 광물이 무려 60여 가지라 하지 않나. 광물채굴과 정련과정에서 소모되는 전력과 망가질 생태계 그리고 저임금에 동원된 아동들의 노동착취를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그런데도 기업들은 지속적으로 새 제품을 개발하고 소비를 조장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죠. 향후 또 어떤 물건들이 무덤의 자리로 추가될까요.

기겁할 일은 또 있습니다. 팔리지 않은 명품의류의 재고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의류업체 브랜드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땡처리하지 않고 멀쩡한 것들을 모두 소각 처리한다고 하니, 이를 어쩌면 좋은가요. 언제까지 이 지구의 공공재를 아끼지 않고 펑펑 써버리는 작태를 멈추게 할 방도는 없는 건가요. 지금으로선 쉽지 않으니 절망에 이르게 할 뿐입니다.


요즘 세상은 겉으론 멀쩡하다 못해 평온한 듯 보입니다(TV화면에 내비친 예능프로그램 상의 화려함 속에서). 하지만 몇 년 후가 될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미래는 어둡고 칙칙해질 텐데. 97년에 겪었던 외환위기를 넘어선 미증유의 가난이 대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오히려 가난이란 삶의 기울기를 각자 포착함으로써, 그 반등 작용으로 삶의 본질에 치중해서 변화의 기회를 엿볼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요. 물질의 노예에서 벗어나 생활의 무게를 줄이고, 나아가 최소한의 지닌 물건만으로도 가난함 속에서도 참 행복에 머물게 하는.

이럴 때 물자절약 운동이었던 옛 범국민 *아나바다운동을 재개해도 좋을 듯싶습니다. 나와 같은 할머니세대는 가난을 겪은 터라 그나마 문제의 적용대상이 되지 않을 테지만요. 풍요로운 시대에 태어나 어려움에 봉착할 젊은이들이 마음에 걸릴 뿐이지요. 하지만 생활비를 아껴 어려운 환경을 슬기롭게 넘긴 어느 젊은 세대의 이야기를 접하며 마음이 놓이기도 했습니다. 강요된 가난과 내가 선택한 가난한 삶은 확연히 다르니까요.

윤구병 교수의 저서, 『가난하지만 행복하게』에서 “가난은 나눔을 가르쳐준다. 잘 사는 길은 더불어 사는 길이고, 서로 나누며 사는 길만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라는 구절이 절절하게 다가오는 이유죠. 그러니 가난해질 일에 미리 주눅 들지 말고 겁먹지 않기를. 적응하면 그런대로 뜻하지 않은 일까지 성취하리란 점은 자명해지지 않겠어요.



* ‘아나바다 운동’ – 자원 재활용을 실천하려는 운동. ‘아껴 쓰고 나누어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란 말을 줄여 만든 이름. 97년 외환위기 이후로 전 세계에서 퍼진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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