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노노(老老)돌봄 시대입니다. 며칠 전 전철로 왕복 2시간 넘게 걸린 먼 곳을 다녀왔습니다. 몸은 피곤했고 나른함이 쏟아진 늦은 귀갓길이었죠. 마침 경로석에 앉아 갈 수 있어 다행이라 여겼습니다. ‘서울대공원역’에 정차했는데 남자노인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오더군요. 무리를 지어 공원 나들이를 다녀온 듯 사뭇 들뜬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앉아있는 우리 쪽으로 다가온 그들이 80대로 보였고 일행 한 분은 몸이 비실비실했습니다. 그 모습을 접하고나서 지속적으로 앉아 있기 불편해졌습니다. 곧 이어서 다음과 같은 말이 들려오더군요. “옆의 형님이 올해 94세고 나는 87세야.” 바늘방석이었죠. 나란히 앉아가는 여자 분이 벌떡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는 게 아닌가요. 나와 비슷한 70대일 성 싶은 나이였습니다. 못이기는 척 94세 노인이 그 자리에 앉았고요. 선수를 빼앗긴 나는 얼 만큼 피로도 가신지라 용기를 내 뒤따라 일어서고야 말았습니다. 나 보다 연배가 위인 어른을 이겨낼 도리가 있겠습니까. 노인이 노인을 배려하는 자리 품앗이이었던 거죠. 이젠 전동 칸에서 적잖이 만나볼 광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전용석에 앉으려다 어그러진 임신초기 여성의 사연을 TV로 접했습니다. 그 자리에 이미 좌정한 노인과 마주해 난감했다는 것이죠. 하지만 노인만 앉겠어요, 중년층 심지어 청년들마저 앉아갑니다. 임산부석 지정시기도 꽤 지나왔으나 정착되지 못한 인식에 눈을 감은지 오랩니다. 어르신세대에겐 그나마 이해될 부분이 있습니다. 노인인구는 늘어나는데 턱없이 부족한 노약자석을 보완해줄 행정이 뒤따르지 못하고 있어요. 그런 사유로 비어있는 임산부석이라도 마다않는 노인들이 생겨나는 것이죠. 아직은 버틸 체력이라 임산부석에 앉지 않습니다만 그 같은 노인들의 처지를 받아들이려 하죠(나 또한 80대 이후에 앉고 싶은 유혹을 과연 뿌리칠 수 있을지요). 늙어 본 사람만이 늙은이의 몸뚱이를 헤아리니까요. ‘노약자석’외에 전동 칸 중앙에 마련된 ‘교통약자 배려석’이 따로 있습니다. 장애인 영유아동반자 또는 일시적으로 몸 불편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석이죠. 그런데 ‘노약자석’에는 청년들이 얼씬하지 않은데 비해 그 ‘배려석’에서는 무색한 장면이 이어지더군요. 그 앞에 서 있어도 일어서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노인도 장애가 있는 사람에 포함되니까요. 전동 칸 앞뒤로 밀려난 자리에 배정된 ‘노약자석’에 눈독 들이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요.
한편 청년층의 입장에서 헤아려 보기로 했습니다. 늙어보지 않아 ‘늙음’을 단지 관념적 언어의 함정으로 빠뜨릴 수 있는 청년세대. 나도 그 시절을 거쳐 왔으니까요. 집안의 막내인 늦둥이로 태어난 내게 10대시절의 부모님은 조부모와도 같았습니다. 그때의 내가 뭘 공감했겠습니까. 이제 그분들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그때의 소홀함을 통렬하게 반성하며 뉘우칠 뿐입니다. 그러니 늙어본 적이 없는 우리 청년들 또한 노인의 대상을 낯선 이웃 정도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요.
요새 빠르게 변화하는 가속성에 중독돼 노인세대인 나도 정신을 못 차릴 정도에요. 하루가 다르게 낯선 환경이 이어지는 지금의 현실. 이를 따라잡으려 숨 가쁘게 뛰다보면 타인을 배려할 마음이 모자랄 수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에 노출되고 자기 본위의 삶에 주력해도 모자랄 판국일 테니까요. 그런데요 이럴 때 역설적으로 노약자들에게 배려하는 마음을 키울 기회로 삼으면 어떨까 합니다. 젊음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늙음을 타자의 경우로 미뤄 살아가지는 않겠지요. 배려하는 마음씀씀이는 장래에 대한 충분한 투자가치가 있습니다. 꾸준히 잇다보면 이 또한 뛰어난 ‘공감능력의 소유자’로서 사회활동 영역에서 뒷심으로서 발휘할 날도 분명 오지 않겠어요. 어쩜 이런 능력이야말로 이 사회가 적극적으로 권장할 부분이 아닐는지요.
나는 사회적으로 ‘어르신 세대’로 불립니다. 그런데요 단지 연령만으로 ‘청년’과 ‘노년’으로 구분지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거든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고의 소유자가 청년이라면 정적이고 수구적 태세의 세력이야말로 실로 노년임을 자인하는 꼴입니다. 겉모습만 청년이 아닌 유연한 사고를 지녀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청년다운 청년’이 많이 배출되어 나오길 이로써 희망합니다. ‘청년성’이란 청년에 속한 연령층만이 향유하는 전유물이 아닌 모든 이가 따를 윤리적 가치로서 그 위상이 드높기 때문입니다.
일상에서 은어로 토착된 ‘라떼’, 이순간만은 당당한 라떼가 되어볼 요량입니다. 잘못된 부분은 짚고 넘어가야 하니까요. 대중교통에서 마주친 일부 여성들을 향해 어른으로서 한 마디 해야겠어요.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젊은 여성들이 스스럼없이 화장을 하는 모습인데요. 부끄러운 줄 모르고 아예 화장품 케이스에서 다양한 화장품과 도구들을 순차적으로 꺼내 오래도록 공들이는 모습에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우리 라떼세대로선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입니다. 외국에서는 밤 여인들의 모습에서만 볼 수 있다는 점을 모르는 모양입니다. 정말 품위 없는 짓을 자행하는 그 같은 여성들은 ‘청년다운 청년’과는 아예 거리가 멀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다수의 청년들은 우리의 고귀한 존재이며 자산이며 희망의 대상임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러니 그와 같은 일로 청년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일을 제발 멈춰 주길 바라는 마음입니다.